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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04. 2023

나무늘보가 느리다는 것

플라뇌르

나무늘보가 느리다는 것          


시원하고, 맑은 아침이었다. 마치 오랜만에 렌즈를 닦은 안경을 쓴 것처럼 눈에 가닿는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한층 선명하다. 유튜브 화면에서 톱니바퀴 아이콘을 누르고 ‘최대 화질’을 선택한 듯한 기시감마저 느껴지는, 비유하자면 그 정도로 무척 선명한 아침이다. 하늘 빛은 편안하고 창으로 빗겨 들어오는 태양 광선의 입자까지 알알이 눈에 들어 온다. 봄은 언제나 그렇듯 오지 않을 것처럼 지독하게 굴더니, 온다. 이런 날에는 단지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금세 정신적인 포만 상태가 된다. 그리고 정신적인 포만도 마치 식후의 포만감이 사람을 너그럽게 하듯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한결 너그럽게 누그러트린다.     


나는 동물원 가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전부터 봄이라고 생각해왔다. 전세계 어디든 동물원이라는 곳은, 당연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동물을 중심으로 모든 일정이 짜여지는 곳이다. 주인공인 동물의 당일 컨디션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서 그리고 시간대에 따라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동물원에 간다고 해서 그곳에 지내고 있는 동물들을 모두 보고 올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놀이 동산에서 탈 것의 우선 순위를 정하듯, 동물원에 방문하기 전에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누가 뭐래도 ‘보고 싶은 동물 정하기’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느 동물원이든 그곳에 만약 ‘나무늘보’가 있다면 나에게 반드시 봐야하는 동물은 언제나 영순위로 나무늘보였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귀여운 펭귄이나 레서 판다가 있어도. 멋진 호랑이와 코끼리가 있다고 해도, 나는 언제나 열렬한 나무늘보의 추종자다. 그리고 동물원에 가장 걸맞는 계절이 봄인 것처럼, 봄에 가장 가까운 동물은 단연코 나무늘보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무늘보는 게으름뱅이의 왕이다. 이름부터 ’느림보'라고 한다. 문제는 대체 얼마나 느리느냐. 평균적으로 나무늘보는 한 시간에 약 4미터를 이동한다. 한창 바쁠 때는, 예컨대 화장실이 급하다거나 엄청나게 배가 고프다거나 하는 상황이라면, 한 시간에 400미터 정도 땀을 뻘뻘 흘려가며 달린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동물원에 가서 나무늘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르마딜로가 몸을 둥글게 웅크리는 것을 보는 것만큼이나 무척 귀하고 드문 장면이다. 그만큼 나무늘보는 뭐든지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가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바로 ’식사‘인데, 맛있는 나뭇잎을 먹으면서도 꾸벅꾸벅 잠이 들 정도다.     


역시 나무늘보가 느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배설도 일주일에 한번 꼴로 한다고 하니, 얼마나 느린지 우리는 대충 미루어 짐작해 본다. 그런데 내가 조금 놀란 것은 바로 나무늘보의 몸에서 식물이 자란다는 것이다. 털의 내부에 약 900여종(!)의 녹조류와 나방과 딱정벌레와 같은 생물들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어 살고 있다. 건기에는 갈색의 식물, 우기에는 초록 식물로 계절에 따라 그 색도 바꿔가면서 나무늘보는 자신의 몸에 나름의 조경 생활을 펼쳐 나간다. 참 가지가지 하는 구만. 어쩐지 거대한 바다 거북의 등딱지를 섬으로 알고 살아가는 생태계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다.      


도대체 몸에서 식물이 자랄만큼 느리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무늘보는 굼뜬 행동 만큼이나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상상해본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푹신하고 보드라운 흙바닥을 느릿느릿 기듯이 배를 대고 걸어가는 나무늘보의 마음을. 풀숲 내음과 나무 뿌리의 온갖 감촉을 충분히, 심각할 정도로 충분히, 느끼며 나무늘보는 가고 있다. 꽃 향기를 가득 품은 따스한 봄바람이 불면, 멈추고 바람을 착실하게 맞는다. 나뭇잎 사이로 따스한 볕이 내려오면 자신의 털 속의 생태계를 생각하며 잠시, 넉넉히 몇 시간 쯤, 기다린다. 걸음 걸이 만큼이나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간다. 어쩌면 나무늘보는 단지 무감각한 바보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느끼는 지라 채 빠르게 움직일 수 없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자신의 털 속에 하나의 봄이라는 계절을 품고 평생에 걸쳐 그 느긋함과 나른한 생동감 속에서, 자신만의 여유로운 시간 감각을 가지고 나무늘보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동물이 왠지 봄 그 자체로 보인다.     


언제나 따뜻한 봄이 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절로 느른해지곤 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쩌면 그것이 단순히 우리의 몸과 마음이 릴랙스 되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선명한 봄의 날씨 아래에서는 모든 감각이 새로 깨어난 것처럼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느껴진다. 그것을 그저 받아 들이는데만도 벅차서 우리는 도무지 무언가를 이리저리 따져보고 사리있게 분별 할 여력을 거의 상실한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느긋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명해져서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통에 우리는 일종의 감각적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그저 착실하게 그리고 나름대로 공정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마치 신경이 너무 예민해서 행동이 굼뜨게 되어버린 나무늘보처럼, 우리는 봄이라는 계절에 다가오는 것들을 그저 정직하고 올곧게 받아들이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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