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불안, 그리고 강박
이번 10월 둘째 주에는 엄마의 5주기 제사를 지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출근을 시작한 시기를 지나 5년 치 성장을 했다는 의미였다. 5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꿈에서 아빠처럼 살아있는 엄마를 보고, 엄마처럼 사라져 가는 아빠를 본다.
5년간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그동안은 그냥 넘겼을 '사소한 촉'을 넘길 수 없어졌다는 점이 요즘에는 불편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꾼 꿈, 엄마의 49재 전후로 꾼 꿈같은 것들은 우연으로 넘기기에는 구체적이고 강렬한 면이 있었다. 이렇게 나는 사소한 징후나 터무니없는 꿈도 가볍게 넘길 수 없어져버렸다. 아빠가 등장하는 어떤 꿈이라도 꾸면 반드시 전화를 해서 아빠가 여전히 잘 살아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아빠한테 3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해요."
"3일이 넘어가면 불편한가요?"
"최근에는 3일을 넘긴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못 넘기겠기는 해요."
강박이네요. 상담사의 진단은 명쾌했다.
장성한 자식이 부모의 안부를 묻는 게 어떻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우리 가족은 아주 쿨한 사이였다. 며칠 국내여행을 갈 때에도 출발하는 당일에 카톡을 하나 남기는 게 전부였다. 해외여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 또한 부모님이 휴양 여행을 가 있다는 사실을 사후에 공유받았다.) 심지어 어학연수 차 외국 생활을 할 때에도 몇 달이고 카톡 하나 없이 잘만 지냈다. 그래서 2-3일에 한 번씩 전화하지 않으면 일상에 지장이 생겨버린 지금의 상황이 더욱 어색하고 불편하다.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트라우마, 증폭되어 버린 예기불안 기질, 불안을 부추기는 주변인의 주기적인 자극 등으로 나는 현재 아주 피곤하고 강박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 있어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약속이라도 잡는 날에는 꼭 아빠에게 그 사실을 미리 고지한 뒤 죄책감을 덜어내곤 한다.
내가 전화를 해오면 아빠는 나에게 '아빠는 늘 그렇듯 잘 있으니, 네가 네 할 일을 잘하고 재밌게 노는 게 아빠를 돕는 일'이라고 당부한다. 그러면 지인이 난데없이 연락을 해서는 '너희 아빠랑 연락은 잘하니? 잘 지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말로 내 불안감에 불을 붙이는 식이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얘기를 하지? 아빠가 잘 지내지 못할 어떤 징후가 있었나? 내가 연락을 안 하는 것 같아 보였나? 내가 이런 작은 신호를 그냥 지나쳤다가 나중에 또 후회할만한 일이 생기면 어쩌지?
이런 경험이 반복될수록, 걱정 없이 내 인생에 집중하며 사는 게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죄책감과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 같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이렇듯 부모/부모 뻘의 일관적이지 않은 피드백은 성인이 된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불안으로 마음이 연약해져 있을 때에는 주변인의 걱정 어린 한 마디에서도 비극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한 차례의 심리상담을 지나왔지만 10번의 상담만으로 상처가 완치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내 심리적인 문제를 자세히 알게 되어, 어떤 순서로 치유해야 할지 결정하는 단계가 남아있을 뿐이다. 트라우마, 불안, 공황 중 어떤 걸 먼저 해치워야 할까. 치유 중에 새로운 문제가 생겨 상담 주제가 또 바뀌게 되지는 않을까. 아예 정신과 약물 치료도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외상 후 트라우마 장애를 완전히 치료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계속해보는 수밖에 없다. 새로운 상담센터에 찾아가 내 얘기를 처음부터 다시 꺼내고, 진단을 체화하는 과정. 무엇보다 불길한 예감은 실없는 상상일 뿐이라는 걸 경험하면서 데이터를 쌓는 수밖에는 없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니, 최선을 다해 내 마음의 완치를 위해 노력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