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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리모아 Dec 10. 2022

왜 공부를 안하냐고? '할 만하다'면 뜯어말려도 한다.

자기효능감 가르치기

  세상에는 알아서 하는 인간과 시켜서 하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내 아이가 '알아서 하는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하고나서 알아서 하는 인간을 만들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할 만하지?"




아이들은 왜 공부하지 않는가?

좋다는 사실을 몰라서 안 하는 것일까?


이 글을 보는 여러분은 어떨까?

당장 이 글을 보고 있는 컴과 폰을 끄고 인생에 더 도움되는 공부나 운동을 하라고 했을때,

당신은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인가?

YES라면 지금 즉시 떠나면 된다.


  답이 NO라면

우리는 왜 공부가 하기 싫은 것일까?


  세상은, 학교는, 부모는 강요한다. 하기 싫은 일을 '하라'고

오늘도 누군가는 엄청난 의지로 참아가면서, 고통을 견뎌가면서, 공부하거나 운동한다.

언젠가 얻을 백점짜리 시험지나 슬림 탄탄 몸매와 같은 찬란한 미래를 위해

이 세상에는 그렇게 고통 속에 공부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며 부모들은 자꾸 알려준다. 모두가 알고 있는, 아이들도 모르지 않는 그 사실,

"너도 공부해~ 하면 니 인생이 좋아져!"

알고 있다. 알지만 하기가 싫은 것이다.

당신처럼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무렵 나는 무척이나 실력 없는 선생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 초보 시절의 나에게 수업을 듣고 싶진 않다. 첫 수업을 하고 나서 학생으로부터 선생님을 바꾸고 싶다는 연락을 전해들었다. 수업에 들어가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식은, 학생 앞에서 중구난방으로 쏟아졌다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그렇게 두 명의 학생이 연속으로 떠나갔고, 몇 명의 학생을 다시 받는동안 나에게 하나의 말버릇이 생겼다.


  내가 수업을 잘 했는지, 내가 말한 내용이 잘 전달되고 있는 지가 걱정되어 설명이 끝나면 항상 "어때? 이해됐어? 할 만하지?"라는 질문으로 자꾸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딱히 무슨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내가 수업을 잘 하고있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 그에 대한 간접적인 피드백을 학생에게서 얻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질문을 던지자 내가 어떤 교육을 학생에게 제공해야하는지 어렴풋이 그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지껄여야 할지도 모르는 오리무중 상태에서 벗어나, 학생의 현 위치를 진단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공할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 학생의 대답에 따라서, 어렵다고 하면 다시 설명하거나 다른 작품 또는 경험과 비교하여 다시 설명해주기 시작했고, 학생이 이해했다고 말하면 정말로 이해했는지 질문을 던지고 같이 문제를 풀어보았다. 그리하여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같은 질문을 전체 수업에 대해서 다시 던졌다.


"오늘 해보니까 어땠어? 생각보다 할 만하지? 국어 별 거 없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질문으로 효과를 본 것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학생에게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내 수업을 어려워하거나, 그만두고 싶어하는 학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단순히 내 강의 실력이 오른 덕분만은 아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보다 더 잘가르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음에도, 내 수업을 그만두고 학원으로 떠났던 학생이 어머님께 부탁드려 다시 나를 찾아오는 경우가 정말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나보다도 학생에게서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였다. 어떤 변화였을까?




  학생들도 어른들도 누구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하기 싫은 마음이 드는 것은, 공부를 계속 해나가며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그 고통을 나도 모르게 계산하며 내가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한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점수나 체중계로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나마 의욕을 불태운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그저 참고 견디려는 의지와 앎은 대부분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아무도 안 시켰는데, 아니 심지어는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애걸복걸해도 무언가에 미쳐사는 사람들, 퇴근하고 꼭 헬스장에 들려 웨이트를 하는 인간들, 밤새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재미이다. 과연 그럴까? 실제로 운동이든 공부든 재미 있을 때도 있다. 실제로 내 자신이 바로 소설이 재밌어서 국어선생님까지 된 케이스니까 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 최상위권 학생들에게 공부는 전혀 재밌어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재밌냐고 물어봐도, '그냥 하는 거죠 뭐' 라는 식의 대답을 들을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나에게 더 많은 문제를 달라고 요청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독서를 학생들에게 시켰을 때, 대부분의 학생은 10분만에 이런 식으로 말한다. "머리아파요/눈아파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결론은 대부분 "재미 없어요"로 귀결된다. 이렇게나 재밌는 독서를 10분만에 포기하고 폄하해 버리다니! 서운했다. 하지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하려해도, 아이의 말도 맞는 것처럼 느껴져 뭐라 설득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독서는 재밌다는 내 의견도 맞고, 독서는 재미 없다는 아이의 의견도 맞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럴 수가 있다.

단순한 추락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은 없지만, 번지점프의 재미는 익히 알려져 있지 않은가?

감자 껍질을 하루에 300개씩 까거나, 빵반죽을 팔이 부숴져라 주물럭 거리는 일은 분명히 재미없는 일이다. 그 밀가루 덩어리가 빵이 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걸 조물딱 거리고 있진 않을테니까.

 요리가 아무리 재밌다고 우겨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 그런데도 요리 선생님들은 요리가 재미있다고 말한다.

수영은 재밌지만 킥판을 잡고 물장구 30분을 연습하는 건 재미없다.

아니 이런 간단한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런 아이에게 "아니야 독서는 재밌어"라고 말했으니, 아이에게는 당연히 공부를 시켜려는 거짓말로 느껴질 수 밖에. 자신이 힘들다고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재밌다고 하는 것은, 그의 힘듦을 부정하는 말이다.  잘 모르겠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10분 이상 견디는 것은 어른에게도 힘들다. 그래서 이 과정을 버티면 아무리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독서나 운동을 하기가 싫은 것이다. 아이들이니까, 어른이 시키는 것을 10분씩이나 버텨주는 것이다. 독서도 운동도, 분명히 재미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재미있지는 않다. 재미를 느껴보려면 먼저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기에, 운동이나 독서는 늘 밀린 숙제가 되고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우연히 알게 된 "할 만하지?"라는 주문에는 "힘들 수 있어"라는 인정과, "그래도 내덕에 버틸 만했지?"라는 공감과 격려의 비결이 숨어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버틸만해'라는 아주 어렴풋한 감각을, '할 만하지?' 라는 질문으로 구체화하여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 그 고통은 감당'할 만한' 고통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 희미한 자신감은 다음날이면 눈 녹듯 흩어져버리고 만다.


  결국 내가 고통을 마주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그 고통은 재미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전하는 자는 결과가 아닌 그 과정의 고통까지도 즐기기에, 그래서 우리는 번지점프대 꼭대기의 공포를 스스로 찾아나서고, 여행의 피로와 방황을 즐기며, 고중량의 웨이트에서 느끼는 불타는 듯한 근육의 통증까지도 '재밌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교육은, 아이의 성적이 오르지 않는 고통의 연속일 때조차 재미가 있다


인생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게 살며 우리는 인생을 즐기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생에 마냥 즐거움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힘든 와중에도

'살 만하다보니'

재미가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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