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견과 함께 살기
40여 년 전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마당에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놀고 있었다. 시골에 사는 사촌 이모가 데리고 온 아이라고 했다. 마침 가방에 우유가 있어 부어주자, 녀석은 허겁지겁 잘도 마셨다. 조르는 눈빛에 못 이겨 자꾸 우유를 따르자 이모는 ‘짜구난다’며 그만 주라 했고, 엄마는 “그 비싼 우유를 왜 주냐”라고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조르는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내 그림자가 된 강아지. 어른들은 백구라고 했지만 나는 흰둥이라고 불렀다. 개를 유난히 싫어하던 엄마가 왜 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외동인 나는 동생이 새로 생긴 것 같아서 마냥 좋았다. 나는 흰둥이가 묶여있는 마당에서 같이 책을 읽고,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당에서 놀다가 옷이 더러워질 때면 결벽증이 있는 엄마에게 혼났지만, 흰둥이 곁이 좋았다. 학교에서 우유를 나눠주는 날이면, 흰둥이에게 줄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흰둥이와 나눠 마시는 그 짧은 순간이 참 따뜻했다.
나는 학교에서 ‘공작새’라 불렸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오는 나를 두고 선생님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흰 타이즈와 에나멜 구두, 화려한 원피스와 올림머리…. 아이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받기도 했고, 지나가는 어른들이 부모님이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친척과 손님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집, 관심과 사랑이 온통 나에게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수군거림, 동정의 손길, 싸늘한 시선이 오갔다. 흰둥이와 마당에 있으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훌쩍대는 얼굴이 있었고, 철 좀 들으라며 등을 찰싹 때리는 손길도 있었다. 이질적인 공기 속에 스며든 낯선 싸늘함이, 서서히 내 자리를 잠식해 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얼마 후, 엄마 손에 이끌려 간 곳에서 나는 낯선 사람들 틈으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마주했다. 13살 소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냉기와 어색함이 감도는 얼굴들 속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날 이후,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시절,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지금보다 더 넓고 느슨했다. 친척은 물론이고, 동네 어른들, 엄마 친구들까지 모두 이모, 삼촌이었다. 이집저집을 넘나들며 왕래하였고,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을 반가이 불러주는 이웃들의 따스했던 눈빛은 안타까움과 냉랭함 중 어느 한 군데 머물러 있었다. 한 때 귀하게 여겨졌던 아이가 멸시의 대상이 되어가는 모습에 그들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가까울수록 더 쉽게 돌아선다. 힘이 있을 땐 동경으로 다가오지만, 그 힘이 꺾이는 순간, 누구보다 먼저 등을 돌려 가장 깊숙한 곳을 찌른다. 믿었던 만큼 상처는 깊고, 가까웠던 만큼 더 잔인하다. 한때 우리 집을 부러워하던 친척들은, 몰락 앞에서 그 칼날을 숨기지 않았다.
칼끝은 가장 연약한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나를 겨누었다. 얼마 전만 해도 “머리 좋다, 예쁘다”며 웃던 얼굴들이, 이제는 나 때문에 엄마 팔자가 기구해졌다고 혀를 찼다. 더러워지고, 살이 삐죽 튀어나온 옷가지는 동정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어디 하나 기댈 수 없게 된 아이에게, 이들은 약자에 대한 본성을 감추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 또 다른 식구가 들어왔다. 누군가는 나를 돌보아야 했기에, 엄마는 갓 결혼한 막내 외삼촌 부부를 들였다. 하지만 외숙모는 엄마를 탐탁지 않아 했고, 내 존재를 불편해했다. 대문만 열면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에게 대놓고 흉을 봤다. 마주칠 때마다 흘겨보는 눈빛, 쏘아붙이는 말들. 나는 점점 마당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나는 흰둥이와 함께 누렇고 지저분한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어느 날 외숙모가 흰둥이의 목줄을 걷어차며 외쳤다. “개나 사람이나 왜 이 모양이야? 너도 주인 닮았냐?”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뱃속의 아이를 감싸며 노려보던 그 눈빛에, 나는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수십 년이 흘렀어도, 그 말은 서릿발처럼 귓가에 얼어붙어있다.
그 무렵, 나는 점점 입을 닫았다. 흰둥이와 함께 마당 구석에 웅크린 채, 세상과 단절된 듯 둘만의 시간을 버텼다. 아무도 손 내밀지 않던 그 시절. 나에게 남은 건 단 하나, 흰둥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