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바보 종대 12화

흰둥이, 가장 아플 때의 기억 2
내가 버린 존재

당뇨견과 함께 살기

by 규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드러난 집안의 비밀도 감당하기 힘겨웠던 그때, 막내 외삼촌 가족에 끼어 살게 되었다. 엄마가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게 되자 외삼촌네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 현실이 꿈이기를 바라며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며 잠들곤 했다.


라면 하나를 꺼내도 외숙모는 거친 말로 윽박질렀다. 그런 일들이 잦아들자 나를 예뻐하던 외삼촌도 외숙모 눈치를 보며 점차 외면했다. 외사촌 동생이 태어난 뒤로는 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방문 앞에서 멈칫거리다 돌아서는 일이 잦아졌다. 거실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는 내가 다가가는 순간 사라졌고,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나는 그 집안의 불청객이 되었다.


어느 날, 마당에서 큰 소리가 났다. 외숙모가 나를 불러 세차게 고함을 질렀다. 생리를 처음 시작한 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생리대를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이 문제였다. 외숙모는 신문지에 싸야 한다며 나를 몰아세웠고, 쓰레기통을 뒤엎어 생리대들을 마당에 펼쳐놓았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이 모양이냐.” 외숙모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욕했다. 나는 쓰레기 더미에서 생리대를 하나하나 주워 휴지를 벗기고 신문지로 다시 싸야 했다. 외삼촌도 있었고, 이웃들이 슬쩍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울음을 꾹꾹 눌러 삼키니 목구멍이 저려왔다.


얼마 전만 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집안의 애물단지로 여겼다. 친척들은 “니가 있어서 엄마 팔자 못 고친다.”, “고아원에 보낼 수도 있었는데 감사한 줄 알아라.” 같은 막말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모두가 내 탓이라고 했다.


그 말들이 웅웅 울리던 순간, 나는 흰둥이를 바라보았다. 나처럼 외로운 존재였던 흰둥이. 그런데 녀석은 울지도, 짖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혀를 내밀고, 마당 한편에서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네가 혼날 때마다 울었고, 더 먼저 아파했는데…. 넌 왜?’ 참았던 문노가 북받쳐 올랐다. “야!!” 다 들으라는 듯 흰둥이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뒤로 나는 흰둥이를 멀리했고, 어른들처럼 백구라고 불렀다.


집에 들어갈 때면 흰둥이의 눈을 외면했다.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녀석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외숙모에게 맞은 뒤 나를 바라보는 흰둥이에게 보란 듯이 비웃어주었다. 그럴 때면, 천덕꾸러기는 나보다 흰둥이인 것 같았다.


서로 가장 의지했던 존재를 너무도 사소한 이유로 먼저 내쳤다. 그렇게 하면 덜 미움받는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흰둥이보다 내가 더 낫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죄책감이 들수록 흰둥이를 더 미워했다. 내가 받았던 상처를 흰둥이에게 돌렸다. 세상이 나를 버렸듯, 나도 흰둥이를 버렸다.


사람들은 약한 존재 앞에선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갈 곳 없는 아이, 말 못하는 개…. 이들은 너무 쉽게 외면되고, 무시당하고, 잔인하게 다뤄진다. 특히 가까울수록 더 그렇다. 나는 어른들이 그러했듯, 나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 그 폭력을 흉내 냈다.


그 뒤로 점점 독해졌고, 흰둥이와도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흰둥이의 눈동자에서도 어느새 빛이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날 어른들에게 줄에 묶여 끌려가던 흰둥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녀석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가슴이 찢어졌지만, 아무런 저항도하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도 어리고 약했던 나는 비극의 주인공을 외면해 버렸다.


뒤늦게 들은 이야기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식용 개고기가 시장에 버젓이 팔리던 야만적인 시대, 흰 개를 집에서 몇 해 기르다 고아 먹으면 몸에 좋다는 미신이 있었다. 엄마는 이 말을 믿었나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을 겪고 난 후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무력했던 나,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존재라는 회의감은 평생 가시처럼 박혀있다.


그렇게 2년이 흘렀고, 엄마가 돌아왔다. 아버지 유산이 정리되자 돈이라는 힘이 다시 생겼고, 차갑던 시선들도 이내 되돌아왔다. 막내 외숙모는 우리 집을 떠나며 말했다. “다 너를 아껴서 그랬던 거야”. 그때부터였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건.


가장 아플 때 흰둥이를 만났고,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때 종대를 안았다. 병든 종대를 외면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내밀지 못했던 손을 지금에서야 잡아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놓쳤던 것들을 천천히 되돌려주는 일. 미처 전하지 미안함을 작게나마 갚아나가는 일. 우리는 그렇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의 빚을 갚아간다. 어쩌면 그건 윤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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