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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여행자 Jan 15. 2018

1987, 폭력과 광기의 시절

주인공 없이, 모두가 주인공이 된 영화

“턱 하고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1987>은 시대가 주인공인 영화다. 혼자서도 묵직하게 극을 끌어갈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어색하리만치 작은 역할로 조용히 등장하고 사라진다. 인물들은 마치 바통을 이어받는 릴레이 달리기를 하듯, 저마다의 1987년을 숨 가쁘게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바꾼,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어느 한 명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용기를 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될 때 위대해지는 거다.


Scene#1. 사망

1987년 1월, 스물두 살 대학생(여진구)이 사망했다. 남영동 대공분소에서 반독재 데모혐의로 고문을 받던 중이었다. 의사가 오기도 전에 시신은 이미 쇼크사로 정해졌고, 경찰은 짜여진 각본대로 익숙하게 움직였다. 감추고 모른 체 하던,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대였으니, 어쩌면 이런 것쯤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무적으로 눈알을 굴리며 골치 아파하는 게, 그들이 가진 죄책감의 전부다. 피와 폭력이 지배하던 시대에, 비틀어진 애국심이 어떤 것보다 앞에 있다.    


Scene#2. 균열

낮술을 마시는 부장 검사(하정우)는 화가 났다. 평소와 달리 대본에 없는 일을 삐딱하게 벌인다. 시체의 화장을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공짜 술이 이번엔 좀처럼 먹혀들지 않는다. 이상하게 이날만큼은 협박도 회유도 별달리 소용이 없다. ‘이건 너무 한다’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스크래치, 그들이 짜놓은 견고한 판에 작은 균열을 낸다. 손톱으로 그은 희미한 실선이, 두꺼운 얼음 안에서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간다.    

 

Scene#3. 시궁창

희번득하게 눈을 뜬 대공처장(김윤식)도 화가 나 있다. 그는, 누구도 믿기 어려운 거짓 발표를, 아무렇지 않게 척하니 던다. “나는 애국자, 너는 빨갱이”라는 이분법적 확신에 차 있다. “턱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가소롭다. 대공처장은 ‘네까짓 게 뭐 어쩔 텐가’하며 시대를 비웃는다. “퉤!”하고 개돼지 면전에 침을 뱉는 모양새다. 기자들은 그 거대한 벽 앞에서, 무언가를 더 알 수도 할 수도 없다. 더 알려고도, 아니 알려서는 안 되는, 그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게 허우적댈 뿐이다.     


Scene#4. 양심

뇌물을 몰래받던 의사는 마주한다. 이미 시체가 된 대학생 몸에 차갑게 묻어 있던 물기, 바닥을 채우는 광기를. 그곳은 “장님도 눈을 뜬다”는 남영동이다. 새벽에 거기서 은밀하게 걸려온 전화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더러운 일이다. 현장은 딱 한 가지를 가리킨다. 물고문과 질식사. 하지만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생각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누군가 알려고 화장실까지 숨어 들어와 들추면 모를까.    


Scene#5. 갈림길

사무실에서 먹고 자던 기자(이희준)는 취재한다. 사건을 직감했고, 시궁창에서도 진실은 알려져야 한다고 믿었다. 사건의 키를 쥔 검사와 의사가 그런 기자에게 내부 정보를 은밀하게 건네준다. 신문에 짧은 보도가 한 줄 나지만, 그 정도에는 꿈쩍할 미친 세상이 아니다. 명동 한복판에서 기습적으로 열린 데모로 사복형사에게 쫓긴 연희(김태리)는 하루하루를 즐기고 싶은 소시민이다. "우덜도 우리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던"<택시 운전사>의 류준열이 그랬던 것처럼, 연희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이 무섭다. 30년이란 시공간을 넘어, 스크린 밖에서 바라보는 내 몸이 이렇게 덜덜덜 떨리는 것처럼.    


Scene#6. 애국질

묘하게도 상황은 그들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박처장은 자신의 수하인 조반장(박희순)을 내세워 두 명을 위장(?) 구속시키며 분위기를 정리하려 든다. 감옥생활이 길어지며 발끈하자, 박처장은 “너희는 애국자야”라며 다독인다. “가족들이 임진강에서 월북하다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라는 날선 말도 함께.   

 

Scene#7. 부탁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는 걸 눈치챈 교도관(유해진)은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고 한다. 수감 중인 동아일보 기자(김의성)가 기사를 써 재야의 어른(설경구)에게 알려주려 하고, 교도관은 조카 연희에게 위험한 부탁을 한다. 점차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 오며 교도관은 남영동에 끌려간다. 연희는 또 무섭다. “데모를 왜 해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라고 슬프게 묻고, 이한열(강동원)은 “가슴이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라고 애처롭게 대답한다.     


Scene#8. 사망

영화의 끝은, 역사에 기록에 충실하다. 권선징악과 신파의 구도를 따라간다. 박종철 고문치사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세상은 분노한다. 이건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생존과 양심의 경계를 넘는 사건이었다.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나선다. 6월 민주항쟁이 불타올랐고, 이한열은 시위 도중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망한다.     

 

영화는 주연과 조연을 구분하기 어렵다. 장면과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면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렇게 조각난 지도를 모으듯, 각기 다른 인물들의 여정을 추적하다보면, 관객들은 박종철과 이한열을 생생하게 만나게 되고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저절로 읽게 된다.

    

영화 <1987>의 구성은 연작(聯作)소설을 닮았다. (소설가 한강이 그의 책 <채식주의자>와 <소년이온다>에서 이야기를 풀어간 그 방식이다.)이전까지 만난 천만 영화와는 다른 모습이다. 비참한 역사를 시간의 흐름 그대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연출도 사뭇 낯설다. 하지만 광기어린 애국, 나와 다른 상대를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매카시즘(McCarthyism)은, 어제 본 것처럼 눈앞에 진득하니 입안이 혀뿌리부터 쓰다. 앞으로 써내려갈 역사는,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길 무술년 정초에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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