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에너지 안보 개념의 계보
'에너지 안보'라는 말은 누구나 쓴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시대마다 달랐고, 나라마다 다르며, 학자마다 다르다. 개념이 명확하지 않으면 정책도 흔들린다. 재생에너지가 에너지 안보의 수단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한국의 혼란은 사실 개념의 혼란이다. 에너지 안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재생에너지의 위상이 달라진다.
이 챕터는 에너지 안보 개념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변했으며,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를 추적한다. 그 역사를 이해해야 왜 한국의 에너지 안보 정의가 시대에 뒤처져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가 보인다.
[그림 1] 에너지 안보 개념의 역사적 계보 (1973~2025)
출처: Yergin (1988) [1], Kruyt et al. (2009) [2], Cherp & Jewell (2014) [3], Overland (2019) [B-3], Kim et al. (2025) [B-6]
1. 개념의 탄생: 1973년 이전과 이후
에너지 안보라는 개념이 정책 언어로 확립된 것은 1973년이다. 그 이전에도 에너지 공급은 국가 정책의 중요한 관심사였지만, 그것은 '공급의 문제'이지 '안보의 문제'가 아니었다. 안보(security)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에너지가 국가 생존의 문제임을 처음으로 인식했을 때다.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OAPEC(아랍 석유수출국기구)는 이스라엘 지지국들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를 발동했다. 배럴당 3달러였던 국제 유가는 불과 몇 달 만에 12달러로 치솟았다. 서방 선진국들은 처음으로 에너지 공급이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체험했다. Yergin(1988)은 이 순간을 '에너지 안보의 탄생'이라고 명명했다. [1]
충격에 대한 집단적 대응으로 1974년 IEA(국제에너지기구)가 설립됐다. 핵심 메커니즘은 두 가지였다. 첫째, 회원국은 90일 치 이상의 석유 비축을 의무화한다. 둘째, 공급 위기 시 비축유를 공동 방출한다. 이 메커니즘이 오늘까지도 에너지 안보의 기본 인프라로 작동하고 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는 이 개념을 강화했다. 이란 혁명으로 이란 석유 수출이 급감하면서 유가가 다시 폭등했다. 이 시기 에너지 안보의 정의는 단순 명료했다. '화석연료, 특히 석유를 충분히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 공급의 양적 확보가 안보의 전부였다.
한국이 1977년 동력자원부를 설립하고 1979년 에너지이용합리화법을 제정한 것도 이 맥락이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 개념은 이 시기의 국제 표준을 그대로 흡수했다. 그리고 그 개념이 지금까지도 한국 에너지 법제의 기저에 흐른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에너지 안보 정의는 1973년의 것이다.
2. 4A 프레임의 등장과 지배
오일쇼크의 충격이 완화되면서 에너지 안보의 개념도 확장됐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연구자들은 에너지 안보가 단순히 '석유를 충분히 구하는 것' 이상의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을 집약한 것이 2009년 Kruyt, van Vuuren, de Vries & Groenenberg가 제안한 '4A 프레임'이다.
4A는 Availability(가용성), Accessibility(접근성), Affordability(경제성), Acceptability(수용성)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가용성은 물리적 에너지 자원이 충분히 존재하고 채굴 가능한지를 본다. 접근성은 공급망과 수송 인프라를 통해 실제로 에너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본다. 경제성은 소비자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 수준인지를 본다. 수용성은 환경·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에너지원인지를 본다. 이 네 가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한 국가의 에너지 안보 수준을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2]
4A 프레임은 당시로서는 진일보한 개념이었다. 단순한 공급량 확보를 넘어 가격, 환경, 접근성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이 프레임에는 두 가지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첫째, 여전히 화석연료 중심으로 설계됐다. '수용성'이 재생에너지의 자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환경 규제를 에너지 안보의 제약 조건으로 보는 시각이다. 재생에너지가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수단이라는 논리는 4A 어디에도 없다.
둘째, 시스템 취약성을 측정하지 못한다. 4A는 현재 상태를 진단하는 도구다. 하지만 에너지 안보의 핵심 질문—'위기가 왔을 때 이 시스템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에는 답하지 못한다. 한국의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93.9%라는 것을 4A 프레임으로 진단하면? '가용성'에서 취약하다는 신호가 나오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취약성인지, 어떤 시나리오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림 2] 4A 프레임의 구조와 한계
출처: Kruyt, van Vuuren, de Vries & Groenenberg (2009). Energy Policy, 37(6). [2] 한국법제연구원 에너지안보 법제 보고서 (2022) [7]
3. Cherp & Jewell(2014)의 핵심 재정의
4A 프레임의 한계를 가장 정면으로 돌파한 연구가 2014년 Energy Policy에 게재된 Cherp & Jewell의 논문['에너지 안보의 개념: 네 개의 A를 넘어서(Beyond the four As).']이다. 이 논문은 에너지 안보 연구의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Cherp & Jewell의 핵심 주장은 에너지 안보를 '공급의 충분성(sufficiency)'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취약성(vulnerability)' 문제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에너지 안보를 "에너지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허용 가능한 수준을 훨씬 벗어나는 교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원문의 표현을 빌리면 "vital energy systems의 낮은 취약성(low vulnerability)"이다. 이 정의에서 핵심은 '교란에 대한 노출 수준'이다. [3]
이 정의에서 출발해 Cherp & Jewell은 에너지 시스템의 취약성을 만드는 세 가지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첫째는 주권(Sovereignty)이다. 에너지 시스템이 외부의 정치적 결정에 얼마나 종속되어 있는가. 한국이 중동으로부터 원유의 약 70% 내외를 수입하는 것은 이 측면에서 심각한 취약성이다. 중동의 지정학적 결정—호르무즈 봉쇄든 OPEC 감산이든—이 한국 에너지 시스템에 직접 충격을 준다.
둘째는 강건성(Robustness)이다. 에너지 시스템이 예측하지 못한 충격에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가. 공급선이 다양하고, 저장 인프라가 충분하며, 대체 에너지원으로의 전환이 빠를수록 강건성이 높다. 한국의 에너지 시스템은 강건성 측면에서도 취약하다. 단일 공급선(중동)에 대한 과도한 의존, 낮은 재생에너지 비중으로 인한 대체 옵션 부족.
셋째는 회복력(Resilience)이다. 에너지 시스템이 충격을 받은 후 얼마나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가. 비축유는 이 회복력의 핵심 수단이다. 그러나 1.2절에서 분석했듯, 한국의 비축유 208일은 실소비 기준으로 34일에 불과하다.
이 세 메커니즘 분석에서 결정적인 통찰이 나온다. 재생에너지는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에너지 안보를 강화한다. 재생에너지는 태양과 바람을 연료로 한다. 수입할 필요가 없으므로 주권 취약성이 없다. 분산 전원 특성 때문에 충격에 대한 저항력(강건성)이 높다. 공급 교란 시 가동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빠른 대응(회복력)이 가능하다. Cherp & Jewell의 틀로 보면 재생에너지 확대는 에너지 안보의 세 가지 핵심 취약성을 동시에 줄이는 수단이다. 4A 프레임에서는 이 논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림 4-3] Cherp & Jewell(2014) 에너지 안보 재정의 — 취약성 3대 메커니즘과 한국 현황 진단
출처: Cherp, A. & Jewell, J. (2014). "The concept of energy security: Beyond the four As." Energy Policy.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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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rp & Jewell(2014)의 핵심 정의: 에너지 안보는 "사회의 핵심 기능을 지탱하는 vital energy systems의 낮은 취약성(low vulnerability)"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에서 핵심은 교란에 대한 노출이지, 에너지의 양적 충분성이 아니다.
— Cherp, A. & Jewell, J. (2014). "The concept of energy security: Beyond the four As." Energy Policy. [3] ※ 위 표현은 원문 정의의 의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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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010년대 이후: 에너지 안보에 기후가 들어오다
Cherp & Jewell이 에너지 안보를 취약성 개념으로 재정의한 직후부터, 연구자들은 이 틀을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의 맥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재생에너지가 에너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연구 흐름이 시작됐다.
Månsson(2015)은 재생에너지도 지정학적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생에너지 설비 제조에 필요한 핵심광물(리튬, 코발트, 희토류)은 특정 국가에 편중 매장되어 있다. 중국이 희토류의 60% 이상을 생산한다. 이것은 화석연료 의존과 다른 형태의 공급 취약성이다. 재생에너지로 전환한다고 해서 지정학적 의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존의 대상이 바뀐다. [4]
그러나 Overland(2019)는 이 우려를 반박하면서 결정적인 논거를 제시했다. 재생에너지의 지정학은 화석연료의 지정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화석연료는 '추출(extraction)'하는 에너지다. 특정 지역에 매장되어 있어 수출국이 공급을 통제할 수 있다. 반면 태양광과 풍력은 '포획(capture)'하는 에너지다. 특정 지역에 묶여 있지 않고, 어느 나라나 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OPEC 같은 재생에너지 카르텔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수출 금지도 의미가 없다. [5]
이 논쟁의 최종 심판은 2022년에 이루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의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이 무기화됐다. 유럽 국가들은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면서 재생에너지 확대를 명시적으로 에너지 안보 전략으로 채택했다. REPowerEU는 '재생에너지 확대=러시아 의존 탈피'를 공식 정책 프레임으로 삼았다. 이론적 논쟁이 현실에서 검증된 순간이었다.
2025년 Kim, Jaumotte, Panton & Schwerhoff는 IMF Working Paper를 통해 이 관계를 모델 기반으로 실증했다. 글로벌 일반균형 모델(CGE)을 사용해, 국제탄소가격제 시나리오 하에서 녹색전환이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안보를 개선하는 효과가 새로운 취약성(핵심광물 의존 등)을 상회함을 입증했다. '녹색전환은 에너지 안보에 순(net) 긍정 효과를 낸다'는 이 결론은 국제 학계의 현재 컨센서스다. [6]
제4장 핵심 명제
① 에너지 안보 개념은 1973년 탄생 이후 4세대에 걸쳐 진화: 공급 안정 → 4A → 취약성 → 기후+안보 통합.
② 4A 프레임(Kruyt et al. 2009): 화석연료 중심 설계 + 시스템 취약성 측정 불가 — 재생에너지는 수용성 하위 문제로만 처리.
③ Cherp & Jewell(2014): 에너지 안보 = 취약성 최소화. 3대 메커니즘(주권·강건성·회복력) — 재생에너지는 세 가지 모두 개선.
④ 2019~2025: 녹색전환이 에너지 안보에 순긍정 효과임을 이론(Overland)·실증(Kim et al.)으로 확인.
⑤ 한국의 위치: 여전히 1세대~2세대(4A) 개념 — 국제 학계와 10~15년의 개념 격차.
▌ 제4장 주요 참고문헌
[1] ★ Yergin, D. (1988). "Energy security in the 1990s." Foreign Affairs, 67(1), 110–132.
[2] Kruyt, B., van Vuuren, D.P., de Vries, H.J.M. & Groenenberg, H. (2009). "Indicators for energy security." Energy Policy, 37(6), 2166–2181.
[3] ★★ Cherp, A. & Jewell, J. (2014). "The concept of energy security: Beyond the four As." Energy Policy, vol.75.
[4] Månsson, A. (2015). "A resource curse for renewables? Conflict and cooperation in the renewable energy sector." Energy Research & Social Science, vol.10.
[5] ★ Overland, I. (2019). "The geopolitics of renewable energy: Debunking four emerging myths." Energy Research & Social Science, 49, 36–40.
[6] ★★ Kim, J., Jaumotte, F., Panton, A.J. & Schwerhoff, G. (2025). "Energy security and the green transition." Energy Policy, vol.198 / IMF Working Paper 2024/006.
[7] 박기선, 「에너지안보 및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에너지법제 정비방안 연구」, 한국법제연구원, 202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