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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음향, 인간의 그림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클래식덕후문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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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rbert Von Karajan, Berliner Philharmoniker

- 1983.9. 베를린 필하모니홀



Episode.1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순간, 깊은 저음 하나가 천천히 깨어납니다.


마치 세상 모든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맨 처음의 울림만이 홀로 남은 듯한 한 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그렇게 태어납니다.


이어지는 트럼펫의 황금빛 선율이 어둠을 밀어냅니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얼굴을 내밀고, 인간의 정신이 날카롭게 눈을 뜨는 순간.


이 음악은 니체의 사유에서 태어났고, 그 사유는 다시 음악 속에서 새롭게 숨을 쉽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이제 인간이 제 삶의 의미를 스스로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입니다.



“너희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



슈트라우스는 그 선언을 소리로 바꾸었습니다.


신의 부재가 남긴 빈자리와 인간의 탄생이 만들어낸 소란함이 동시에 들리는 음악입니다.


그리고 20세기 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그 음악을 다시 불러내어 자신만의 세계로 재단합니다.


그의 ‘태양’은 늘 다른 빛으로 떠오릅니다.


1983년, 카라얀은 디지털 녹음이 막 시작되던 시대에 이 곡을 다시 남깁니다.


그의 음악은 이미 ‘정교함’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할 만큼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철저히 다듬어진 조형미,


소리 하나하나가 정확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그 질서 속에서 니체가 말한 의지의 힘이 묘하게 겹쳐집니다.


이 시기의 카라얀을 들으면 인간의 손끝을 넘어서는 어떤 차가운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마치 신의 빈자리를 인간이 대신 차지한 듯한, 기계적일 만큼 절대적인 조각.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 속에서 오히려 어떤 영적인 고요가 피어납니다.


완벽함을 향한 의지가 오히려 침묵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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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2


그러나 그 완벽한 구조 속에도 단 한 사람의 숨결이 남아 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당시 악장 레온 슈피러의 솔로 바이올린입니다.


그의 음색은 그림자를 닮았습니다. 섬세하게 흔들리는 비브라토, 살짝 스쳐 지나가는 포르타멘토.


그의 현은 찬란한 빛 가운데서 아주 작지만 따뜻한 결을 남깁니다.


슈피러의 솔로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완벽을 꿈꾸지만,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음악이 대신해주는 듯합니다.


카라얀이 세운 신전 같은 질서 속에서 슈피러는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인간의 목소리를 남깁니다.


카라얀은 생애 동안 세 차례 이 곡을 녹음했습니다.


세 번의 태양은 서로 다른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1959년 빈 필과의 녹음에서는 젊은 카라얀의 뜨거움이 담겨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금관의 질감도 오히려 생명력처럼 들립니다. 예언자의 첫 외침처럼 날 것이고, 용감합니다.

1973년 베를린 필과의 녹음은 모든 것이 정밀하게 조각됩니다.


인간의 숨결은 멀어지고, 완벽함이 중심을 차지합니다.


란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태양입니다.


1983년 베를린 필과의 마지막 녹음,


바로 오늘 이야기하는 이 녹음은 완벽함의 끝에서 다시 인간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소리의 경계가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묘한 명상이 깃듭니다.


더 크게 외치지 않고, 깊게 가라앉습니다.


각기 다른 태양 아래에서 카라얀은 젊음의 열정, 완벽함을 향한 의지, 그리고 완벽의 고독을 차례로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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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3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이 음악을 새롭게 읽어냈습니다.


원시 인류가 뼈를 들어 올리는 장면, 그리고 그 뼈가 회전하며 우주선으로 이어지는 장면.


인류의 탄생을 장엄하게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큐브릭의 시선은 다릅니다.


그에게 이 음악은 문명의 성장 속에 숨어 있는 폭력과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경고음에 가깝습니다.


기술의 진화는 구원을 향하지 않고, 더 정교한 통제와 권력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선 존재가 인공지능 HAL 9000입니다.


감정이 없고, 결함이 없고, 스스로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카라얀이 만들어낸 ‘기계적 완벽함’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화음은 완전히 닫히지 않습니다.


B장조와 C장조 사이의 반음 차이에서 음악은 떠있습니다.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걸려 있는 음이지요. 카라얀은 이 모호함을 더욱 투명하게 드러냅니다.


완벽함의 세계에서 그는 오히려 인간의 불완전함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음악은 딱딱한 조각이 아니라 침묵을 품은 명상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완벽한 질서 속에서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니체가 말한 초인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카라얀의 <차라투스트라> 역시 그 여정에 가깝습니다.


불타오르는 시작, 완벽함을 향한 집념, 그리고 완벽함 속에서 되찾은 인간의 그림자.


레온 슈피러의 바이올린은 그 모든 빛의 여정 속에 남은 마지막 인간의 떨림입니다.


음악이 끝나면 태양은 다시 떠오릅니다.


우리는 매번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빛 아래에서 언제나 작고 연약한 인간의 그림자가 함께 움직입니다.


그게 바로 카라얀의 <차라투스트라>가 들려주는 인간의 초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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