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rgiu Celibidache, Munchner Philharmoniker
- 1993.9.12~13, 가스테이그 필하모니아홀
Episode.1
세상에는 들으면 마음이 저절로 위로 솟아오르는 음악이 있습니다.
성당의 첨탑처럼 곧게 올라가고, 무너질 틈 없이 단단한 구조를 가진 음악.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이 바로 그런 종류의 음악입니다.
브루크너는 이 곡을 “내 영혼 전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그 말처럼 이 곡은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거대한 성전을 만드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장엄하게 자라납니다.
하지만 1993년, 루마니아 출신의 거장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지휘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이 음악을 이미 완성된 성당처럼 다루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공기, 벽에 스며 있는 오래된 침묵,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아주 작은 속도 같은 것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겉모습보다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간’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요.
Episode.2
첼리비다케는 음악이란 녹음되는 순간 본래의 생명을 잃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음반 작업도 거의 하지 않았고,
빨리, 정확하게, 효율적으로 연주하라는 시대의 요구에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공식 실황 중 하나가 바로 이 브루크너 8번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연주는 음악이라는 틀을 넘어, 그의 마지막 고백처럼 들립니다.
Episode.3
장 미셸 바스키야(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1980년대 뉴욕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화가입니다.
거리낙서에서 출발해 단숨에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올라섰고,
사회적 편견과 인종 문제를 작품 속에 강렬하게 담아냈습니다.
얼마 바스키야의 작품 「Skull」을 보았습니다.
그 그림이 유난히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해골은 보통 죽음을 떠올리게 하지만,
바스키야의 해골은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뛰고 있었습니다.
삐뚤어진 선, 벗겨진 색, 비어 있는 공간들이
죽음이 아니라 “나는 지금 여기 있다”라는 외침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Episode.4
그의 1악장은 거대한 산맥이 천천히 눈을 뜨는 것 같습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저음이 깨어나고,
그 위로 빛이 한 겹, 또 한 겹 더해집니다.
보통 이 악장은 힘과 긴장으로 몰아붙이며 연주되지만,
첼리비다케는 모든 음이 서로 가까워지기까지의 시간을 먼저 보여줍니다.
서둘러 이어지지 않고, 저마다 고독하게 떠 있다가
천천히 서로의 빛을 알아보고 연결됩니다.
2악장인 스케르초는 원래 사냥을 떠올리는 두근거림과 빠른 리듬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그는 속도를 줄이고, 리듬을 바닥까지 눌러서
대지에서 울리는 거친 심장박동처럼 들리게 만듭니다.
춤도, 질주도 아닌
‘내부에서 흔들리는 세계의 소리’에 더 가까운 느낌입니다.
3악장은 이 교향곡의 심장이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오래 숨을 들이켰다가 아주 천천히 내쉬는 듯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넓고 깊은 호흡이 흐릅니다.
첼리비다케는 이 악장을 거의 시간이 멈춘 듯 지휘합니다.
음과 음 사이의 여백이 오히려 더 크게 들릴 정도입니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끝내 닿지 못하는 어떤 ‘영원’의 문턱에 서 있는 장면 같습니다.
마지막 악장은 종말 같기도 하고, 거대한 세계가 정리되는 순간 같기도 합니다.
보통은 폭발적인 승리로 끝나지만,
첼리비다케의 해석은 더 조용하고 깊습니다.
끝에 다다른 인간이 승리보다 먼저 느끼는
가쁜 숨, 작은 두려움, 마지막 고요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래서 그의 4악장은 결론이라기보다,
살아온 시간을 조용히 정리하는 노인의 손짓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악장들이 흐르다 보면
브루크너의 성당 같은 음악은
첼리비다케의 손끝에서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시간을 견뎌내는 여정’으로 변합니다.
Episode.5
바스키야의 해골에는 귀가 없습니다.
세상의 잡음이나 평가에서 멀어지려는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첼리비다케도 그랬습니다.
세상의 기준, 음악 산업의 요구,
때로는 단원들의 불만조차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 안에서 울리는 시간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바스키야의 해골이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마지막 표정’이었다면,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는
신을 찬양하는 음악이 아니라
인간이 상처를 견디고, 시간을 통과하는 방식에 대한 음악이었습니다.
브루크너는 신을 향해 음악을 썼지만,
첼리비다케는 그 음악 속에서
인간의 균열을 보았습니다.
완전히 매끈한 구조보다
틈이 있는 곳에서 생명이 자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pisode.6
바스키야 역시 찢긴 선과 거친 색 속에서
가장 진짜에 가까운 표정을 길어 올렸습니다.
둘은 다른 시대의 사람이었지만,
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존엄은 완벽함이 아니라, 균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첼리비다케의 느린 박자처럼,
바스키야의 삐걱거리는 선처럼.
그들의 예술은 조용히 말합니다.
“빛은 깨진 자리에서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