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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과 구원의 사이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y 클래식덕후문쌤

- Glenn Gould

- 1981.4.22.~25 / 5.15.19.29, 30th Street Studio/New York City



Episode.1


세상이 멈추는 순간에도 음악은 멈추지 않습니다.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에서 외계인은 인간의 문명을 구할지, 없앨지 판단하기 위해 지구에 내려옵니다.


그는 한 집의 거실에 앉아 인간을 지켜보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함, 그러나 고요함 아래에서 거대한 중심축이 천천히 돌아가는 듯한 음악.


마치 인간의 마음 한복판을 아주 미세하게 흔드는 소리 같습니다.


그 장면은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문명을 판단하려면, 그들이 남긴 소리를 먼저 들어보라.”


외계인의 시선에서 보면 인간은 늘 소란스럽습니다.


전쟁을 벌이고, 욕망에 흔들리고, 불안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음악만은 다릅니다.


말의 소음도, 갈등도, 드러내려는 욕망도 사라지고 오직 한 인간이 남긴 구조의 아름다움만 남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사실 하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소리를 만든 종족을, 정말 멸망시켜도 되는가?”





Episode.2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강하게 밀어붙이는 음악이 아닙니다.


작은 아리아가 30개의 변주로 다시 태어나면서, 마치 인간이라는 존재의 여러 얼굴이 한 장씩 펼쳐지는 듯합니다.


바흐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만듭니다.


그 그릇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음악은 매번 다른 빛깔을 띱니다.


영화 속 외계인도 그 앞에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인류를 심판할 힘을 가진 존재가, 단순한 선율 앞에서 멈춰 서 있다는 사실.


그것은 문명이 숫자나 무력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움직임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pisode.3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글렌 굴드의 1981년 골드베르크 녹음이 떠오릅니다.


굴드는 바흐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1955년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는 파격 그 자체였지요.


그는 피아노 앞에 앉은 ‘인간’보다 하나의 ‘현상’에 가까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천재, 누군가에게는 괴짜.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의 골드 베르크만큼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 연주는 드물다는 점입니다.


1955년 젊은 굴드가


“세상에는 이렇게 눈부신 음악이 있다"라고 외쳤다면,


1981년의 굴드는


“세상은 결국 이렇게 조용히 흘러간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는 속도를 과감히 늦추고,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을 더 두텁게 쌓았습니다.


그 침묵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혼란을 내려놓는 시간에 가깝습니다.


마치 영화 속 외계인이


인류의 소란을 내려놓고 음악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순간과 닮았습니다.


굴드의 느린 템포는 나이가 들어서 느려진 것이 아니라


모든 소음을 걷어내고 남은 ‘본질’을 바라보려는 태도였습니다.


멀리서 인간은 복잡해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단 한 줄의 선율처럼 단순해진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

었던 것 같습니다.





Episode.4


영화는 결국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소리를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전쟁이나 경제력 같은 외형적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음악, 우리가 가진 연민,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몸짓이


문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남깁니다.


바흐의 선율은 외계인을 설득했다기보다,


그의 마음 깊이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굴드의 1981년 연주도 그렇습니다.


화려함 대신 고요함을, 과장 대신 본질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연주를 들을 때마다 깨닫습니다.


세상이 잠시 멈추더라도,


음악은 여전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진짜 얼굴을 천천히 밝혀준다는 사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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