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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도시의 숨결이 교향곡이 될 때

필립 글래스 교향곡 4번 <Heroes>

by 클래식덕후문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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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nnis Russell Davies, The American Composers Orchestra

- 1996, Looking Glass Studio /New York City



Episode.1


베를린의 겨울을 떠올리면 언제나 회색빛이 먼저 떠오릅니다.


건물 벽 사이로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 낮게 눌린 하늘,


그 속에서 하루를 묵묵히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


1977년, 데이비드 보위와 브라이언 이노가 이 도시에서 <Heroes> 앨범을 만들었을 때의 공기 역시


이 회색빛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때는 나눠진 독일, 나눠진 베를린이었으니까요.


<Heroes>는 단순한 록 음반이 아니라,


벽과 벽 사이에 남아 있던 불안과 희망, 실험과 침묵이 한데 섞여 태어난 풍경이었습니다.



Episode.2


그로부터 19년 뒤인 1996년, 필립 글래스는 이 풍경을 다시 펼쳐 들었습니다.


그는 보위ㆍ이노의 음악을 오래전부터 단지 록의 차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담긴 공기, 반복, 정서, 감정의 미세한 떨림에서


그가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의 언어와 통하는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이미 교향곡 1번 「Low」를 통해 보위 세계를 오케스트라로 확장해 본 글래스는


같은 흐름 위에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보위ㆍ이노의 <Heroes> 앨범에 담긴 여섯 곡의 결을 각각 하나의 악장으로 삼아


단순한 편곡이 아닌 재구성과 재창조의 교향곡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이 교향곡 4번 「Heroes」(1996)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와 아메리칸 컴포저스 오케스트라는


이 새 작품의 기운을 그대로 품은 첫 시기의 녹음을 남겼습니다.


이 1996년 녹음은


글래스의 구조적 투명함과 보위ㆍ이노의 정서적 그림자를


가장 섬세한 거리감으로 조율한 해석으로 평가받습니다.



Episode.3


글래스는 현대음악 속에서 복잡한 이론과 난해한 구조를 벗어나


반복과 단순함을 통해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낸 작곡가입니다.


그의 음악은 ‘미니멀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훨씬 더 인간적인 세계와 닿아 있습니다.


복잡한 감정보다 호흡이 먼저 오고,


대단한 선언보다 반복되는 리듬이 먼저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의 교향곡 4번은 이 미니멀한 언어가


보위ㆍ이노의 베를린 시대 정서와 만났을 때


얼마나 풍부한 울림을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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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4


교향곡의 첫 장면인 1악장 「Heroes」는


원곡의 뜨거운 박동과는 다르게


조용히, 도시의 바람처럼 시작됩니다.


되풀이되는 리듬은 서서히 주변을 밝히는 파도 같고,


러셀 데이비스는 그 파도를 절대 거칠게 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단어는 함성보다도


오히려 잔잔한 결의처럼 가슴에 내려앉습니다.


2악장 「Abdulmajid」로 흐르면


회색빛 하늘 사이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빛 같은 온기가 번집니다.


보위가 아내의 이름에서 따온 이 곡은


글래스의 손에서 인간적인 따뜻함을 은근하게 품은 선율로 바뀌었고,


데이비스의 연주는 그 온도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갑니다.


하지만 따뜻함은 길게 머물지 않습니다.


3악장 「Sense of Doubt」에서 음악은 다시 깊은 그림자로 가라앉습니다.


원곡에서도 가장 어두운 곡이었는데,


글래스는 그 어둠 속에 도시의 비탈길 같은 깊이를 추가합니다.


러셀 데이비스는 이 어둠을 단단하게 유지하면서도


완전히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게 ‘틈’을 남겨둡니다.


그 여백 덕분에 이 악장은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 같으면서도


어딘가 돌아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길을 품고 있습니다.


이어서 4악장 「Sons of the Silent Age」는


베를린의 겨울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투명합니다.


보위의 서늘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정서가


글래스에게서는 길고 가는 선율로 다시 나타나고,


데이비스의 손끝에서


말보다 오래 남는 침묵의 감정으로 바뀝니다.


5악장 「Neuköln」에서는


도시가 가장 깊은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원곡에서 색소폰이 남기던 허공의 울음 같은 외로움은


글래스의 오케스트라에서는 현악기의 차가운 흐름으로 번집니다.


데이비스는 이 흐름을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무겁게 몰지 않습니다.


도시의 외로움이 지나가는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을 조용히 남깁니다.


마지막 6악장 「V-2 Schneider」에서


음악은 다시 빛을 향해 움직입니다.


보위의 색소폰이 지녔던 자유로운 에너지가


글래스의 반복 구조 속에서 단단하게 다듬어져 떠오르고,


데이비스는 그 상승을 한 걸음 정도 들어 올린 뒤


조용하게 작품을 닫습니다.


폭발적인 결말이 아니라,


회색 어둠 사이로 아주 작은 빛이 새어 나오는 순간 같은 결말입니다.



Episode.5


보위와 이노가 1977년에 남겨놓은 회색빛의 풍경,


그 풍경을 글래스가 1996년 오케스트라의 언어로 다시 쌓아 올렸고,


그 새 작품의 숨결을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와 아메리칸 컴포저스 오케스트라가


같은 해의 온도로 남겼습니다.


이 세 시점이 포개져 태어난 이 교향곡은


결국 한 가지 진실을 말하는 듯합니다.


영웅은 거대한 박수 속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회색빛의 하루를 묵묵히 버텨내는 사람들입니다.


벽과 벽 사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아주 작은 온기를 지켜내던


그 두 사람처럼.


우리는 모두, 그렇게 조용한 영웅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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