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빛으로 그린 사랑, 브람스와 프레이레가 들려준 고백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by 클래식덕후문쌤


IMG_4734.jpeg?type=w966

- Nelson Freire, Riccardo Chailly, Gewandhausorchester Leipzig

- 2006.2.13~18,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Episode.1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어둠이 맞아줍니다.


어둠은 그 공간의 바탕이고, 빛은 그 위에 천천히 스며듭니다.


벽을 가르는 십자가 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이 방 안을 천천히 적시는 순간,


마치 오래 묵힌 마음이 조심스레 언어를 얻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도 제게는 늘 그런 음악입니다.


특히 브라질 출신의 피아니스트 넬슨 프레이레와


이탈리아의 거장 리카르도 샤이, 그리고 멘델스존의 따뜻한 숨결이 묻어있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함께 만든 이 연주는,


어둠을 깨우는 빛의 움직임을 닮았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감정을 감추지도 않은 채, 마음의 구조를 조용히 드러내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IMG_4735.jpeg?type=w966



Episode.2


이 연주는 한 인간의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다시 세워졌는지를 소리의 건축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브람스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깊은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슈만이 정신적 붕괴로 쓰러졌고, 그 곁을 지키던 클라라를 바라보는 브람스의 마음은 짙은 슬픔과 죄책감,


말할 수 없는 애정으로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협주곡의 첫 장면은 마치 ‘빛의 교회’에서 아직 빛이 닿지 않은 회색 벽을 보는 순간처럼,


거대한 구조물이 금이 가는 소리로 들립니다.


샤이는 이 긴장을 무겁게만 밀어붙이지 않고, 오케스트라의 근육질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음들의 윤곽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위에 프레이레가 첫 독주를 올립니다.



IMG_4736.jpeg?type=w966



Episode.3


그의 음색은 돌처럼 단단하지만 결코 차갑지 않습니다.


부드럽게 깎인 대리석이 손바닥에 닿을 때의 감촉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 긴 첫 악장은 결국 상처 난 구조물의 버팀목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들립니다.


브람스가 복잡한 감정을 조율하며 다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다시 설 수 있는 바닥을 찾으려는 몸짓 같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고요하게 2악장으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은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유명한 문장,



“나는 당신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라는 고백과 함께 떠오릅니다.


이 고백은 빛의 교회 십자가 틈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의 결을 꼭 닮았습니다.


프레이레는 이 악장에서 음 하나하나에 숨을 불어넣듯 조용히 마음을 비춥니다.


그의 건반 터치는 아주 가까이 다가가면 금이 갈 것 같은 마음을 다루는 사람처럼 섬세합니다.


샤이는 오케스트라를 공기처럼 배치해 피아노의 속삭임을 살려줍니다.


그래서 이 악장을 듣고 있으면,


말로는 끝내 건네지 못한 문장들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빛으로 바뀌어 나오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초상은 직접적인 그림이 아니라, 한 사람을 오래 바라보며 조심스레 지켜온 마음의 잔상 같은 것입니다.



IMG_4737.jpeg?type=w966



Episode.4


마지막 악장은 모든 감정의 층위를 지나 다시 구조를 세우는 과정처럼 들립니다.


샤이는 리듬을 단단하게 다져 음악에 새로운 기초를 놓고,


게반트하우스는 독일 악단 특유의 묵직한 음색으로 그 위를 채웁니다.


프레이레는 화려함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깊이와 명료함으로 음을 쌓아 올립니다.


마치 무너진 곳에 다시 견고한 벽돌을 놓듯이, 서두르지 않고 차곡차곡 구조를 완성합니다.


그 결과는 폭발적인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오래된 교회에 아침 빛이 가득 차오르는 순간처럼 잔잔하면서도 강한 울림으로 남습니다.



IMG_4743.jpeg?type=w966



Episode.5


‘빛의 교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빛이 처음 들어오는 찰나가 아니라,


빛과 어둠이 한 공간 안에서 함께 머무는 시간입니다.


프레이레와 샤이가 들려주는 이 협주곡도 그렇습니다.


고통과 사랑, 절망과 희망, 슬픔과 위로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자리에 조용히 놓여 있는 음악입니다.


그 안에서 브람스는 마침내 오래 숨겨둔 문장을 완성합니다.



“나는 당신의 초상화를, 빛으로 그렸습니다.”



IMG_4744.jpeg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15화회색 도시의 숨결이 교향곡이 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