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eller Quartet
- 1997.5, Altes Stadttheater Eichstatt(Old State Theater)
Episode.1
마트에 들어서면 가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선반을 바라보다가,
이 세계가 거대한 패턴으로 엮여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드는 순간 말입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99 Cent>는 바로 그 느낌을 사진 한 장에 압축해 놓은 작품입니다.
색색의 상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맞추고,
선반은 수평으로 뻗어 나가며,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서든 작아져 배경처럼 흩어집니다.
시끌벅적해야 할 풍경이, 이상하게도 조용하지요.
Episode.2
저는 이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이 생각납니다.
바흐의 마지막 작품. 그리고 바흐가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작품.
그런데 이 음악을 들으면 미완성이라는 느낌보다
오히려 하나의 질서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인상만 남습니다.
마치 99센트의 선반 속에서 상품들이 규칙을 이루듯,
바흐는 하나의 작은 선율을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 작은 선율은 특정 감정을 표현하는 멜로디라기보다는, 하나의 씨앗처럼 보입니다.
씨앗 하나가 줄기를 만들고, 줄기에서 가지가 뻗고,
가지 끝에서 또 다른 작은 무늬가 태어나는 느낌이랄까요.
Episode.3
켈러 사중주단의 연주는 이 ‘무늬’를 한 겹씩 드러내는 데에 남다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속도를 과하게 내지도, 감정을 덧칠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확대경을 들고 한 줄 한 줄을 따라가듯, 그들은 바흐가 남긴 선율의 길을 아주 조심스럽게 밝힙니다.
이 연주를 듣다 보면 음악이 아니라 ‘구조’를 듣는 것 같고,
구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질서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가만히 자리 잡습니다.
Episode.4
푸가는 어렵게 느껴질 필요가 없습니다.
한 목소리가 나오고, 그 뒤를 다른 목소리가 따라 부르고, 그렇게 서로를 모방하고 변주하는 방식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듯 따라가고 숨어들고 다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움직임이 겹치고 쌓이며 부드러운 숲처럼 자랍니다.
켈러 사중주단은 이 숲의 결을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나무 하나하나가 똑바로 서 있는 듯한 느낌,
그러나 전체를 보면 숲이 한 덩어리의 생명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동시에 찾아옵니다.
그 모습이 바로 <99 Cent>와 겹칩니다.
상품 하나를 바라보면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사물들입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면이 되고, 그 면이 다시 패턴을 이룹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하나의 점처럼 사라지고, 구조만 남습니다.
구르스키는 이 구조를 사진이라는 평면에 새겨 놓았고,
바흐는 소리라는 시간의 흐름 위에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켈러 사중주단은 그 구조를 선명하게 다시 빛으로 꺼내 보여줍니다.
Episode.5
저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99 Cent>를 바라볼 때마다 인간의 존재가 작아지거나 무의미해진다는 느낌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은 산만하고 복잡해 보이지만, 때때로 선반처럼 가지런히 배열된 순간이 있고,
그 속에서 질서가 조용하게 숨 쉬고 있습니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그 질서를 소리로 들려줍니다.
말년의 작곡가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것은 감정의 폭발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보다,
세상 어딘가에 놓여 있을 무늬, 인간이 발견할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는 균형의 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Episode.6
켈러 사중주단의 연주는 이 무늬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바흐가 남긴 흔적을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되살립니다.
음악은 천천히 선반을 지나가는 시선처럼 흐르고,
패턴은 과하지 않게,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며 우리를 한 걸음씩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음악은 조용히 끝납니다.
그러나 선반은 여전히 이어져 있고, 구조는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지나치고, 누군가는 잠시 멈춰 바라보겠지요.
저는 그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순간이 예술이 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