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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가치를 만든 사람들

하이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by 클래식덕후문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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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mon Rattle, City of Birmingham Symphony Orchestra, CBSO Chorus

- 1990.3.24~26/4.29, the Butterworth Hall/Warwick Arts Centre/University of Warwick



Episode.1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막 태어날 무언가가 숨을 들이켜는 그 찰나, 아주 작은 떨림이 세상을 바꿀 준비를 할 때입니다.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바로 그 순간에서 시작합니다.


혼돈(Chaos)이라 불리는 서곡은 마치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소리의 입자들이 흩어지다가,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처럼 들립니다.


사이먼 래틀이 1990년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그린 음악은 그 혼돈을 유난히 투명하게,


그러나 극도로 절제된 긴장으로 그려냅니다.


무언가 시작되기 전의 세계는 이렇게 불안정하고, 또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혼돈 속에서 질서가 생겨나는 과정’.


어쩐지 가치 투자 이론을 만든 벤저민 그레이엄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저서 <현명한 투자자>를 보면,


시장에서 가격은 늘 요동치고, 사람들의 감정은 흔들리지만, 그중 어떤 것들은 묵묵하게 제 가치를 향해 움직입니다.


그레이엄은 그걸 ‘내재가치’라고 불렀지요.


음악으로 치면, 겉으로 크게 들리지 않아도 그 안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본질의 선율’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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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2


혼돈의 서곡이 끝나면, 하이든은 가장 극적인 순간을 배치합니다.



“빛이 있으라.”



이 장면은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환한 소리의 폭발’ 중 하나입니다.


어둠을 뚫고 터지는 C장조의 밝음은 그 어떤 언어보다 빠르게 인간의 본능을 흔듭니다.


래틀은 그 찰나를 길게 기다립니다.


현악이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고, 코러스는 잠시 멈칫하다가,


정말 ‘빛’이라는 단어가 물리적인 무게를 가진 것처럼 세상에 떨어뜨립니다.


그레이엄의 투자 철학에서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던 기업에, 모두가 무가치하다고 말하던 숫자 속에,


갑자기 ‘빛’처럼 진짜 가치가 모습을 드러내는 때입니다.


시장은 그제야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아, 이건 애초에 이렇게 밝은 존재였구나.”



빛은 가격이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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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3


음악에서든, 투자에서든, 밝음은 언제나 내부에서 태어납니다.


이후 천지창조는 각 날의 창조를 조밀하게 쌓아 올립니다.


물과 땅이 나뉘고, 식물이 돋아나고, 동물이 생기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등장합니다.


하이든은 마치 정교한 시계공처럼 모든 요소를 하나씩 배치하며 세상을 완성합니다.


그레이엄 역시 시장을 ‘무대’가 아니라 ‘구조’로 보았습니다.


가치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고, 시간이 쌓이고, 버텨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층이 하나씩 더해지며 비로소 완성됩니다.


자의 세계에서 하루의 상승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오랫동안 구축된 질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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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4


래틀의 1990년 녹음은 바로 그 ‘질서의 공학’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각 창조의 장면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안정된 박자감과 투명한 악기 배치를 유지합니다.


그 덕분에 전체 오라토리오가 거대한 하나의 구조물처럼 보입니다.


마치 가치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듯합니다.


창조의 마지막에 인간이 등장하는 순간, 음악은 한층 따뜻해집니다.


하이든은 자연 앞에서 놀라워하는 인간의 감정을 사랑스럽게 그립니다.


코러스는 마치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처음 발견하는 듯한 환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레이엄이 말한 내재가치도 결국 인간의 시선에서 완성됩니다.


가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이야기, 역사, 가능성, 지속성입니다.


사람이 그 가치를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투자는 추측이 아니라 판단이 됩니다.


래틀의 해석은 이 ‘인간의 음악’을 특히 정교하게 만듭니다.


현악은 결을 가늘게 하고, 목관은 숨결을 불어넣듯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음악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의 가치를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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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5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감동적인 이유는 화려한 장면 때문이 아닙니다.


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


즉 거대한 세계를 떠받치는 ‘골격’이 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엄도 말했습니다.



“투자는 결국 단단한 것을 붙드는 일이다.”



가격이 아니라 가치, 소음이 아니라 구조, 유행이 아니라 지속성.


이 세 가지가 맞닿는 지점에서 우리는 현재를 넘어 미래를 보게 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래틀의 지휘 아래에서 천지창조는 단순한 종교 오라토리오를 넘어


‘가치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경이롭고 성실한 과정인지 들려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가 음악을 지탱하듯,


숨어 있는 가치가 자산을 지탱하듯,


보이지 않는 질서는 언제나 세상의 본질을 가만히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도, 투자도, 음악 감상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은 진짜 가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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