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 최초의 4승 투수 최동원
최강의 무쇠팔, 롯데자이언츠의 전설, 선동열도 인정한 최강의 투수
1984년의 가을, 3승 3패로 삼성과 롯데는 잠실야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한 마지막 7차전을 치르고 있었다. 삼성의 왼손 투수 김일융과 상대편 롯데에서는 지치다 지친 한 명의 에이스. 안경을 연신 만지며 다크 서클에 몸동작은 정상이 아니었던 고독한 에이스. 그러나 그는 또다시 투혼과 기적을 발휘하며 한국시리즈 사상 승리 투수 4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그는 40년이 지난 현재,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적 인물이자 신화가 되었다. 이쯤 되면 다들 누군지 짐작할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상징이자 한국 야구의 대들보. 고 최동원 투수이다.
최동원 투수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에서 전설적으로 활약했던 투수 선동열도 존경하는 위대한 투수였고, 그는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말 그대로 무쇠팔이라는 별명답게 선발로서 전천후 활약을 보여줬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업적을 기려 최동원상까지 만들었으니 얼마나 뛰어난 선수였는 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야구팬들은 그의 성적에만 최고로 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야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순수함과 열정 등을 보며 팬들은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기억하고 있다. 오죽하면 그가 펼친 경기를 주제로 퍼펙트게임이라는 영화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그 정도로 모든 점에서 훌륭했던 최동원 투수를 필자의 지식과 깜냥으로 그가 거둔 성적보다는 외적인 면을 중심으로 작성해 보겠다.
최동원 투수는, 현재까지 부산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투수이다. 패스트볼은 기본이고, 가장 위력적인 커브를 보여주신 분이다. 더구나 그 어려운 투구 자세로 밸런스를 맞춰 타자를 농락하는 투구 스타일, 장타를 맞아도 다음 타석에 나오는 해당 선수에게 또 같은 던지는 자신감 넘치는 투수 등... 수식어가 너무 많아도 많아서 쓰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 위대한 투수가 아마추어에서 많은 투구로 고생을 했고, 롯데에 입단하면서도 롯데에서 최동원이 혼자 성적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힘든 시즌들을 보냈다. 롯데의 모든 것이 최동원에게 집중되었고, 이슈가 되었으며, 부산 사람들은 그의 선발 경기를 볼 때마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응원했다. 그는 그 혹사에도 성적이 좋았고, 그의 인품과 순수함과 자신감 차는 모습에 팬들은 많았다. 필자는 그 당시에 태어나 옹알옹알하는 시기였기에 최동원 선수의 경기를 녹화 방송과 자료 화면으로 아주 늦게 보았는데.. 정말 대단한 말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표현하고 싶다.
그렇게 그는 롯데에서 모든 것을 바쳤고, 뛰어난 성적에도 그는 항상 구단과 마찰을 빚었고, 그것이 연일 사건이 되면서 롯데와 점점 악연이 되고 말았다. 겨우 겨우 최동원 선수와 롯데는 봉합을 해서 한해 한해 잘 넘겼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김대현 투수가 사망을 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선수의 인권에 불만을 느낀 그는 선수협의회라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것이 결국, 독이 되고 말았다. 그 독은 그에게 트레이드라는 엄청난 사건이 되었고, 선수협의회는 실패로 돌아갔으며(이 선수협은 훗날 만들어졌고, 자세한 정보는 검색을 하셔야 이해가 빠릅니다. 설명하기엔 빡빡해서 생략함.) 결국 그에게 야구 인생은 불꽃처럼 튀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순간이 되고 말았다. 결국,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어 큰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이른 은퇴를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필자는 겨우 한글을 떼고, 야구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었을 때, 안경을 쓰고 부산 사투리에 재밌는 말투로 토크쇼나 오락 프로그램의 게스트로서 동시에 해설자로 활약하는 그의 모습을 봤었다. 그때 필자는 최동원 선수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몰랐을 때였다. 아, 그냥 재밌는 분이시구나라고 느꼈던 그가 선동열 투수와의 맞대결을 영상으로 보았을 때, 으잉? 뭐지? 와? 멋지다... 이 말만 되풀이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그는 은퇴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필자뿐 아니라 모든 팬들에게 각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야인으로서 지내다가 다시 프로야구 코치이자 2군 감독으로서 류현진을 최고의 에이스로 만든 도우미로서의 역할도 한다. 그가 류현진을 일찍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류현진의 신인왕이자 최다 18승은 없었을 것이고, 메이저리그는 좀 더 늦게 데뷔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선수를 보는 안목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코치이자 감독으로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경기감독관을 한 후 우리들 모습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된다. 그의 몸이 너무 야위어진 것이다. 통통했던 그의 몸이 순식간에 바뀌면서 필자는 짐작했었다. 아프구나... 그는 결국 암에 걸렸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그렇게 최후에 가서야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1주일 후에 그와 트레이드된 최고의 교타자 장효조 선수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맞게 된다. 두 분 모두 50대에 돌아가셔서 정말 야구계로서는 충격이 컸고, 팬들도 안타까움이 컸었다.
최동원 투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야구 인생과 세계관, 철학, 경기 스타일, 경기 모습 등 다양한 면에서 그의 모든 것을 팬들도 알게 되었다. 오직 롯데의 우승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그 고귀한 정신, 어렵고 힘들어도 모든 선수들이 야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노력한 그의 모습, 어린아이뿐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야구에 대한 관심을 이끌고자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과 방송에 출연해 노력한 모습 등등... 그가 추구한 모든 면에서 야구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렇게 과거뿐 아니라 현재 프로야구 선수들이 최동원 투수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가 바로 야구에 대한 소신이 아주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아주 강했다. 그래서 구단과 마찰을 빚었음에도 투수로서 역할을 최대한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도자로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 이제 동상으로 남아있고, 그의 이름을 딴 상이 존재하면서 우리의 두뇌와 마음에는 영원히 최동원 투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항상 한국시리즈가 열리게 되면 회자되는 그의 승리 투수 4승.... 이제 그 기록은 불멸의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기록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하늘에서도 영원히 멋진 투구를 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