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여행 에세이#2 -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
누군가의 인생을 제3자의 입장에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관찰한다면 매우 단조롭게 보일 것이다. 영화 트루먼쇼처럼 말이다. 24시간 내내 빨간 불이 켜진 채인 카메라의 시선은 드라마틱한 감흥을 주지 않는다. 우리의 인생이 이야기로 바뀌는 순간은, 그의 인생 중 한 장면을 포착할 때이다.
예를 들어, 오늘 'h' 그녀의 한 순간을 들여다 보자. h는 아침 일어나기 전, 잠자리에서 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 마음속으로 'y, 그의 전화군.' 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뜸을 들이며 고민했지만, 결국 전화를 받는다.
y왈, "받았네? 자고 있었나? 미안한데. "
"저번엔 아침 6시에도 깨워놓고서?"
"그랬나?"
"기억 안나요? 그래놓고 내가 너였으면 기분 나빴을 텐데 라고 했잖아요?"
"전화하자마자 짜증이야?"
갑자기 h가 당황했다. 사실 h의 맘 속엔 이틀동안 연락이 없던 y에 대한 원망이 있다. 삼일 전, 둘은 대판 싸웠고 y가 h에게 '너에게 품었던 마음을 내려놓을거야.'라고 말했다. h는 그러지 말라고, 앞으로 잘해보자고 매달렸다.
h는 내내 y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그간의 원망때문에 막상 전화가 온 순간 전화를 받을지 잠시 고민했다. y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달래주기를 기대했지만 y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의 관찰자도 작가도 아닌 자신의 삶 속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y는 '나중에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h는 그의 일방적인 태도에 넋을 잃었다.
1인칭 주인공 화자로 살아가는 두 주인공이 만날 때, 우리는 3인칭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써야 한다. y는 토요일인 어제도 회사에 출근했고, 저녁에 h와 통화하며 진을 빼고 싶지 않았다. h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 때 h의 까칠한 대답이 거슬렸다.
h는 예민했고, y는 h를 이해할 마음이 없었다.
사랑에 대한 논의는 방대한 영역이 되겠으나, 높은 수준의 긍정적인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사랑은 외부 대상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큰 쾌락을 경험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어떠한가? 사랑은 쾌락을 선사하면서도 수많은 오해와 갈등을 낳는다. 우리가 왜 자주 사랑에 실패하는지,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을 들어 설명한다면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상화이며, 허구이다.
흔히들 성숙해야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은 인간이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지 설명한다. 생후 6개월~18개월 사이에 아기는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를 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거울에 비친 형상은 아기에게 쾌락을 선사하는데, 최초로 자신의 형상을 확인하기 때문이오, 스스로 신체적 움직임의 조절이 미숙한 아이의 느낌에 반해 보이는 형상은 완벽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만족감을 느끼며 자아를 계속적으로 발달시킨다. 그러나 자아의 발달은 본질적으로는 허구이며 나르시시즘의 환상에 불과하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실제 자 신이 아니라 타자이며, 자아의 발달은 타자와의 동일시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가면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우게 된다.
자아의 형성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하며 오인의 산물이 란 점이, 인간의 숙명이오, 삶의 아이러니다.
타인의 존재는 나의 존재를 빛나게 해 준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나는 더욱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그 기쁨을 만끽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허구일 뿐이다. 상대또한 마찬가지다. 관계에서 자신은 주인공이 되길 원한다. 상대에게 공감이란 가치를 강요하며 서로를 옥죈다.
h와 y의 얘기로 돌아가려 한다. 공감은 타자를 1인칭화했을 때 얻어진다. '지금 내게 짜증내는 그녀, 왜 그럴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 이 사람은 이틀동안 연락하지 않았을까, 바쁜 나머지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 보다.' 2인칭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철저하게 나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타자화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나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너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일이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것은 철저히 추측에 의한다는 것도 맹점이다. 그래서, 공감은 이야기가 끝나고 난후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h가 y와 전화를 끊고 나서 그의 상황을 상상해 본 것처럼 말이다.
너와 나의 이야기, 주인공이 아닌 3인칭 작가가 되어보자. 2인칭 대신 h가 3인칭의 시점을 가져본다면 어떨까? h는 두둥실 하늘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이제, y와 h가 내려다 보인다. 이제 h는 그녀 자신과 상대 y를 관찰할 수 있다. 하늘로 날아오른 기분은 꽤 좋다. y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는 섭섭한 마음은 사라진다.
매몰차게 전화가 끊어진 이후, h는 y와 어떤 이야기를 쓸지 상상해 본다. 상상은 h의 몫이다. 순전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그러면 y와의 다음 전화에서 h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