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약국, 깔개의 발견

by 써머


우리 집에서 중앙로까지 가는 길에 지나치는 OOO교. OOO교는 내가 경기도에서 제주도로 내려와서 처음 발령받은 학교다. 학교에서의 많은 추억을 뒤로 하고 더욱 반가워 한 곳은 학교 정문 옆 OO약국.



아주 오래된 간판이라, 그래서 눈에 띄는 약국이다. 이 동네 자체가 구도심이라 건물들은 거의 다 오래되었는데, 심지어 가게 간판의 전화번호가 여섯자리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전화번호는 맨 앞에 7을 붙여서 다 일곱자리로 바뀌었다. )



OO약국과 '인연'이 생긴 어느 날을 기억한다. 처음부터 이 약국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25분 정도의 거리를 매일 걸어다녔다. 10m 쯤 앞 사거리에는 좀더 세련되고 큰 OO약국이 자리했다. 혹시라도 약을 사야 할 일이 있다면 창신약국은 스킵하고 사거리의 약국을 찾는 것ㅇ ㅣ당연했다.



청춘을 뒤늦게 불태운 어느 날,...... 술병이 났다. 아는 누군가의 생일 날이었고 누나 먹어! 소리에 소주고 맥주고를 진창 마셨다. 다음날 학교에 출근했는데 아이들이 내 몸에서 알콜 냄새를 맡을까 두려웠다. 속쓰림이 덜할까 우유를 마셨는데, 엎친데 덮친격 토를 했다. 응급 상황! 약국으로 달려갔다. 정문에서 열발자국 남짓 나가니 문까지 당도했다. 깔끔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흰 가운을 입고 나를 맞았다. 그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술 마셨을 때는 우유 마시면 안되요. 라고 알려주었다.




그가 준 술병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한 번 더 그 약국에서 약을 샀다. 학교를 옮기고 우연히 그 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내가 필요한 약은 흐릿한데, 약국의 이미지는 매우 선명하다. 허름하고 볼품없는 약국이라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네 개의 문짝에 걸린 유리판이 너무나 깨끗했다. 그 문에 손을 대는 것은 어떤 경건함이 필요한 일이었다. 차마 유리에 내 손이 닿아 지문을 남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끌 하나 없는 유리가 가게 안의 정경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한 남자가 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기를 조금 주춤거리다 그의 모습을 주시하며 아주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남자는 쉽게 고개를 들지 않다 내가 입을 열자 나를 돌아보았다. 손님을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년 전, 내게 술약을 건네 준 그 중년의 약사가 분명했다. 단정한 헤어 스타일이 여전했다. 숱이 많고 짙은 검정색 머리는 기름을 흠뻑 머금고 옆으로 넘겨져 있었다. 반짝이는 금속테 안경도 돋보였다. 아마 십년쯤 지나 다시 만난다 해도 그는 그 스타일을 고수하리라 짐작되었다. 하얀 가운 대신 입은 반듯하게 다려진 셔츠는 꽤 오랜 역사를 가진 듯 했다. 어느새 불어 셔츠에 달라붙은 뱃살이 그와 함께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살이 찐 편은 아니었지만 단추를 목까지 채워 입었기에 조금 답답해 보였다.


약국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안쓰러웠다. 주인의 성격대로라면 잘 정돈된 약품들, 깨끗한 선반들이 있어야 했지만, 정리할만한 물건들이 애초에 보이지 않았다. 손님의 발길이 뜸한 것이 선명했다. 그만의 안식처에 발을 들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이런 생각을 들키지 않아야겠다 싶었다. OO 있어요? 라고 묻자 그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잠시만요. 아니, 그와 비슷한 말을 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웅얼거리는 듯 했기에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그 약을 내어 주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몸이 조금 불편한 걸 깨달았다. 몸을 움직이는 일도, 말을 하는 일도 그에게는 버거운 일로 보였다.


그의 앞에는 유리로 된 수납장이 있었다. 그는 윗부분 뚜껑을 들어 올리려 했다. 나는 그 장면이 의아했는데 수납장 안에는 내가 말한 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전에 그가 하려던 일이 그것인지 모르겠다. 비뚤어진 유리 문을 제대로 닫으려 했을지 모른다. 순간, 와장창 유리문이 수납장 안으로 떨어졌다. 유리는 크게 몇 조각으로 갈라졌고 그의 손바닥에 피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화들짝 놀란 나에 비해 그는 덤덤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나를 향하고는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옆으로 가지런히 넘긴 머리카락 중 몇 가닥이 그의 이마에 흘렀다. 그는 깨어진 유리나 자신의 상처를 쳐다보지 않고 잠시만요 라고 말했다. 곧 내 약을 찾아주겠다는 듯. 다음에 올게요. 라고 말하자 그는 의외로 네, 그러세요. 라고 선선히 답했다. 서둘러 약국을 나와 가게 유리문 너머 그의 모습을 훔쳐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 약국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혹시 나를 기억할까, 유리를 깨는 장면을 그가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수년이 흐르니 용기가 생겼다. 설마 아직까지 약국을 하고 계실까 라는 궁금증도 생겼다. 멀리서 보니 세로 간판은 큼지막하니 그대로였다. 하지만 흰 종이를 덧대어 유리문으로 약국 안의 정경을 볼 수는 없었다. 약국은 문을 닫은 게 분명한데, 간판은 그대로라니, 혹시 언제고 다시 돌아올 마음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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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한 가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찾았다.


출입문 앞에 놓인 '어서오십시오' 깔개. 만약 언제라도 창신약국에 다시 들어갈 날이 있다면 나는 꼭 바닥을 유심히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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