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문학이란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를 읽었습니다. ‘이야기를 위한 몇 개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서문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두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첫 번째는 세헤라자드의 이야기입니다. 세헤라자드는 하룻밤만 지내고 여자들을 죽이는 왕과 결혼합니다. 세헤라자드는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고 다음 날 이어서 하겠다고 합니다. 왕은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해 그녀를 계속 살려둡니다. 세헤라자드는 매일 죽음 대신 내일을 얻게 됩니다. 이야기는 곧 삶인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두반이라는 총명한 사내입니다. 두반은 왕의 신임을 얻지만 이를 시기한 이들의 모함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왕이 두반을 죽이려 하자 그는 재미난 이야기라며 왕에게 책을 권합니다. 왕은 책장을 넘기지만 책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왕은 계속 침을 바르며 책장을 넘기고 페이지에 묻어 있던 독이 그를 죽입니다. 이야기의 부재는 곧 죽음이란 상징입니다. 왜 소설을 쓰는가라는 물음에, 두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이야기가 삶의 본질이란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태어난 이상 이미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이야기를 읽거나 보는 행위를 즐깁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공감을 확대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게 한다는 수전 손택의 말에 동의합니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드라마를 보는 일이 즐겁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타인에 대한 애정을 품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겸허한 자세이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일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윤리적 행위입니다. 그 친구는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흥미롭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야기를 듣는 행위는 곧 쓰는 행위라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우리모두는 이미 작가이고 결말은 죽음으로 동일합니다. 그래서, 삶은 허무하기도 합니다. 커트 보니깃의 말처럼 예술이란 삶을 조금 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허무한 결말을 가진 인간은 좀 더 흥미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갈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좀 더 새로운 것, 미처 보지 못한 것, 인식을 확장하는 일을 꿈꾸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인식 확장에 대한 욕구가 제가 소설을 꿈꾸는 이유입니다. 저는 이것이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한 ‘실현되지 않은 자신의 가능성들’ 혹은 사비나가 사랑한 ‘줄 밖의 세계, 미지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가 무엇보다 집착한다고 선언한 세르반테스의 유산, 돈키호테가 실현한 모험의 자세야말로 삶의 세계를 빛 아래로 보존하는 일이라 믿고 싶습니다. 조금은 아둔한 모습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개인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근대 소설의 의의를 떠올리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열정을 품겠습니다. 스쳐 지나갔던 것들에 관심을 두겠습니다. 문학가의 재능이란 열정이고 노력이다라는 믿음을 잃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