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운전에 집중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은 깐족대는 그의 얼굴이 못마땅한 것이었다. A는 자꾸만 내게 특이한 사람이라며 얼굴을 히죽였다.
처음엔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칭찬으로 들렸다.
"너는 크리스탈이야. 그런데 남들이 보기엔 돌덩이지. 하지만, 그 돌이 실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지."
그러면서 나보고 굴속에서 나오라고 했다. 시종 웃는 얼굴에 이런저런 내 취향을 물어오는 통에 그 말들이 다 호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내 몸을 움츠리게 만들기도 했다. 함께 길을 걸으면 그의 손은 살며시 내 몸 어딘가를 건드렸다. 그는 산낙지 같은 반응이 재밌다며 오히려 더욱 툭툭 나를 건드렸다. 쉴새없이 떠들고 낄낄거리는 그도 나에게는 특이해 보였다. 나를 탐구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장난기가 가득한 어른 소년 같았다. 어른인 듯 아이인 듯, 진심인 듯 장난인 듯. 그에 대한 판단은 어느 지점에 서기엔 애매모호했다.
스킨십에 대한 나의 마음도 그러했다. 어깨가 맞닿자 포근하면서도 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 중간 어느 즈음. 언제는 몸을 빼거나 뿌리쳤지만 내내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그런 사람인걸 깨달았어. 스킨십을 좋아한다는 걸."
이틀째가 되자 그의 행동이 도를 지나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좋은데로 데려가겠다며 교외의 까페에 가자고 했다. 전날 저녁 내내 같이 있던 탓인지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더욱 교만했다. 운전하는 나의 허벅지를 건드리거나 기어에 올린 오른 손을 잡기도 했다. 나는 집중하게 해달라며 드디어 볼멘소리를 시작했다. 그가 소개한 형님과 마주한 식사 자리에서도, 그의 손이 스멀스멀 내 어딘가를 건드릴 때까지는 그가 조금 불편한 정도였다. 어쩌면 나의 이성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좋아하면 만지고 싶은 거니까 라고.
그날 밤 결국 나는 그에게 NO! 라고 말했다. 다음 날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그였고, 오늘까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다음날, 이상하게 이 영화가 보고 싶었다.
영화를 다 보고나자 그에 대한 감정은 확실해졌다. 그리고, 내 안에 써머가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를 두세번 보면서도 한번도 주인공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못했다. 사건의 흐름의 중심에는 남자 주인공 톰이 있고, 써머는 그냥 나쁜 년으로 비칠 뿐이었다.
본격적인 영화 시작 전 보여주는 두 줄의 자막이 그 굳건한 믿음의 큰 획을 차지했다.
The followong is a work of fiction. Any resemblences to persons living or dead is purely incoincidental. Especially you Jenny Beckman. Bitch!
작가는 마치 한을 품은 연애를 한 듯, 한 여인을 지칭하고. 청자인 우리는 화자가 찌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정심을 갖는다. 이야기의 시작은 철저하게 남자의 시각에 서 있다.
는 것은 쉽게 넘어간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오히려 철저하게 써머의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보기로 한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이혼을 보며 써머는 사랑이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랑을 원치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잃는다면 상처 받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어린 소녀인 써머는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를 충분히 길렀다가 싹둑 잘라내버리면서 그 다짐을 연습한다.
사랑을 믿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주변에는 늘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이 있다. 영화에서 풍자적으로 표현된 Summer effect가 그것이다.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 아이스크림 가게 매출은 200퍼센트로 뛰었고, 그녀가 통근하면 타고 다닌 버스는 평소보다 두 배에 가까운 승객들이 탑승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톰이 좋아해서 그녀를 데리고 온 시내 전경이 보이는 언덕이다. 써머가 먼저 톰을 알아보았고, 입을 연다.
"여길 오면 널 볼 수 있을 줄 알았어!"
나쁜 년의 대사라기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정신 못차리면서 열살짜리 동생의 간호나 받는 찌질남 톰과 몇 개월후 결혼반지를 끼고 나타난 써머를 두고 본다면 당연 더 사랑한 쪽은 톰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의 500일을 돌아보면 그 반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먼저 톰에게 말을 건 것도, 애정의 키스를 건넨 것도, 싸웠을 때 비맞은 얼굴로 그의 집에 찾아간 것도 다 그녀가 먼저였으니까.
운명의 상대를 만나야만 한다고 믿는 톰은 오히려 소극적이기만 하다. 써머의 뒤통수를 쏘아보는 행위가 그녀에게 애정의 신호를 주었다고 믿는 팔푼이다. 정말 치졸했을 땐, 써머에게 치근댄 남자를 때린 일이다. 그녀를 위해서였다고 항변했지만, 내내 조용히 있다가 남자가 '저 따위 남자랑 사귀다니'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무시당했단 생각이 들어서야만 일어섰으니까 써머가 톰에게 실망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톰의 곁을 떠나지 못한 써머가 갑자기 그를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써머는 영화 졸업을 보자고 했고 극장에서 펑펑 운다. 그리고 톰은 그녀가 우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링고스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의 기쁨도 슬픔도 함께하지 못한다. 그녀는 처음부터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고 연인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톰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렇게 고대하던 The one 을 만났고, The one도 똑같이 자신을 사랑해 줘야 한다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나의 의사가 기호는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기준으로만 관계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싫다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 자신의 사랑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가 그럴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났고 그런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알겠다. 어떤 사람 옆에 있고 싶은지, 있고 싶지 않은지.
영화 졸업을 보며 써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레인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벤을 보며 자기를 동정했을까. 사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떠올린 걸까.
물론 톰의 찌질함 만큼이나 써머의 행보 역시 꽤나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헤어지자는 든 이유가 자신이 톰을 괴롭혀서라니 기막힌 자기기만이다.
P.S.
이 영화는 Love story가 아니라는 시작 부분의 내레이션은 동의하지 않는다. 분명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맞다. 사랑받고 싶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