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틱틱붐> 리뷰 : 이 망할 놈의 서른

어쩐지 인생에는 스포일러가 없더라

7794800c-c8ab-4335-9f4b-6392860d73ee.sized-1000x1000.jpg 영화 <틱틱붐>의 존(앤드류 가필드)

서른. 그놈의 서른.


유망함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희망’과 ‘꿈’이 아닌 ‘타협’과 ‘포기’를 미덕으로 품고 살기 시작하는 순간. 어쩌면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없다는 깨달음에 옅은 미소로 체념하고 '이만하면 됐다.'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낭떠러지 위 안갯속을 헤쳐나가는 시간이자 그럼에도 걸어가고 있음에, 살아있음에 안도를 하는 시간. 언젠가 삶을 살아갈 모든 이들에게 찾아올 순간. 그럼에도 마침내 지나갈 순간. 서른. 망할 놈의 서른.


20250112131232_ahgofpbr.jpg 뮤지컬<틱틱붐> 존 '이해준' (사진=신시컴퍼니)


<틱틱붐> 속 존은 서른 번째 생일을 앞두고 시한부 인생을 자처한다. "30년 동안 이뤄둔 게 아무것도 없네요? 당신은 곧 이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질 겁니다."라고 시한부 진단을 내린 돌팔이 의사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의 불꽃보다 눈에 띄게 사그라들고 있는 불꽃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번지는 인생.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고군분투가 가엾게 이글거리던 불씨마저 꺼뜨릴 것 같은 공포스러운 순간. 오히려 가망이 없었더라면, 검게 그을린 숯검댕이만 남아있다면 오히려 마음 편히 나의 열정을 땅 속 깊이 묻어줄 수 있었을 텐데.


'30’이라는 숫자는 지난날 활활 타오르던 열정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뾰족한 창 끝이 되어 존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귀퉁이로 몰아넣는다. 그것이 아무런 물리적 실체가 없는 불안의 장막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새도 없다. 존은 단지 '30'이라는 숫자가 빛 한 줄기조차 투과할 수 없는 거대한 암막이 되어 자신을 뒤덮을 거라는 공포 속에서 헐떡거릴 뿐이다.


스크린샷 2025-01-29 오후 7.11.07.png 뮤지컬 <틱틱붐> 장지후(존) 공연사진 (사진=신시컴퍼니)


어릴 적, 아니 이미 다 커버렸다고 생각하는 지금도 어른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지금이 제일 좋을 때다." 이 말은 잔소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내뱉는 어른들의 눈동자에는 찬란했던 순간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뒤이어 따라오는 '안 꾸며도 예뻐.', '살아보니 너 나이 때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더라.' 등의 줄줄이 소시지 같은 말들을 그때는 귀담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진심 어린 푸념에 공감할 수 있을 때는 단지 어른들이 느꼈던 아련한 순간이 내 인생에 스며들어 왔을 때뿐이었다. 그 순간을 맞닥뜨릴거라는 어떤 짐작도 예측도 불가능했으며, 어쩌면 평생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는 삶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길을 미리 걸어간 어른들이 우리에게 유출시킨 삶의 스포일러는 그 순간을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아무런 타격도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틱틱붐>의 존도 모르고, 그의 친구 마이클도 몰랐을 거다. 그들이 붙잡고 있던 끄나풀이 그들의 삶을 지탱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그것은 하늘 위 떠있는 별을 향해 위태롭게 손을 뻗고 아등바등했기 때문에 판단할 수 있는 값진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삶은 내가 붙잡아야 할 무수한 끄나풀이 공중에 널브러져 있고 나름대로의 저울질과 확신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끄나풀을 선택하는 순간들로 가득한 것임을.


마이클은 존에게 얘기한다. "너한테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고. 넌 네 길을 선택한 거고, 난 내 길을 선택한 것뿐이야."라고. 모든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것은 존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던 공허한 메아리였을 것이다. 아무리 존의 귀에 스포일러를 때려 박아도 존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 속에서 튼튼한 방탄유리처럼 마이클의 말을 튕겨낸다.


스크린샷 2025-01-29 오후 7.11.49.png 뮤지컬 <틱틱붐> 공연사진 (사진=신시컴퍼니)


어쩌면 서른 번째 생일을 마주한 존은 귓바퀴에서 맴돌던 시한폭탄이 굉음을 내며 터지는 순간을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째깍거리던 '틱.. 틱...'소리가 멈추고 불발탄이 되어버린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또 다른 나날들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뒤흔드는 굉음 뒤에도, 불발탄에 안도하고 또 불안해하는 마음 뒤에도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존은 흘러가는 시간에 뒤따라오는 삶의 새로운 순간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또 펜을 들고 건반 앞에 앉아 영영 채우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두꺼운 악보 노트를 너의 이야기로, 또 너의 불안으로, 또 불안을 흘려보낸 또 다른 마음으로 차곡차곡 써내려 갈 것이다.


깨닫고 새기는 것들보다 모르고 흘려보내는 것들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일 터. 허둥지둥 불안해하며 낯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별의 모든 조각은 아닐까? 인생은 모든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받아들이고, 그렇기에 문득 깨달음을 얻는 순간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 거쳐온 모든 관계와 사건들이 충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아닐까? 단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why'를 안고 스스로에게 답이 없는 질문을 물어가며 살아갈 것인지, 질문하기를 포기한 채 (또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춘 채) 삶 속에서 잠시 안주할 것인지 그뿐 아닐까? 두 선택에 옳고 그름은 없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마주할 인생의 여러 질문들과 책갈피 위에서 '인생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을 여러 순간 푸념하듯 내뱉게 되겠지.


나는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순간들을 모르고 지나칠 거야. 그래서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꼭 안고 살아갈 거야. 그리고 세상이 파놓은 구렁텅이와 나의 불안이 파놓은 늪에 기꺼이 파고 들어가 볼 거야. 나의 삶과 불안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이롭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쉽고 고통스러운 방법일 지도 모른다. 답도 없는 질문에 끙끙대며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을 거야. 존처럼, 마이클처럼, 수잔처럼. 오늘 하루를 멋지게 살아내겠다고, 오늘 하루 고단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그리고 지나온 모든 것들이 나에게 찬란한 순간으로 빛나고 있었다고 말해줄 거야. <틱틱붐> 속 'Why'로 향해가는 '존'의 모든 여정을 따라간 뒤 나에게 되뇌이는 말들이다.


스크린샷 2025-01-29 오후 7.12.04.png 뮤지컬 <틱틱붐> 배두훈(존) 공연사진 (사진=신시컴퍼니)


방정맞다 싶을 정도로 서른의 날카로운 창촉을 온몸으로 막아내려 하는 한 평범한 인간의 초상. 뮤지컬 <틱틱붐>은 <렌트>를 남기고 요절한 불멸의 천재 예술가 조나단 라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탄생과 삶을 축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숫자 위에서 허우적대는 한 평범한 스물아홉 청년의 불안과 깨달음이 오선지 위에서 날뛰는 이야기이자 뒤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수 없이 나자빠지는 한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더 이상 숨이 남아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나가는 이 세상 모든 ‘존’의 이야기였다.




황조교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hwangjogyo_musical/

황정후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yo_junghoo

피날레비 <고마워요,라슨> LIVE(출연 : 황석희 번역가, 이지영 연출가)┃

https://www.youtube.com/live/vxpHmfI-3RQ?si=dGRfiYvvsgdin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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