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1)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비친 전등의 빛이 망막 안에서 반짝이는 것을 한 번 더 의식한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그가 도착한 곳은 그가 두 번째로 바꾼 병원이었다.
신경과, 김성태 교수라는 이름표를 읽고, 간호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한 그는 환자 대기실에서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예약을 하고도 대기시간은 30분 내외.
그는 가방에서 챙겨 왔던 책을 꺼내 책갈피를 끼워 놨던 페이지를 펼쳤다.
넘겨졌던 페이지를 다시 돌리고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가 다시 돌리기를 수어 번, 자신의 이름이 불린 그는 외래 진료를 위해 만들어진 방의 문을 세 번 두드린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가 그를 보며 인사를 하고 그의 말을 들은 교수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교수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나는, 그가 웃었다고 생각했다.)
교수는 모니터에 떠오른 그의 차트를 확인하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는 교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들어 왼쪽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행동은 그가 자신의 폰 메모장에 기입해 둔 행동과 같았다.
교수가 슬쩍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는 마주 보지 않았고 시선을 내려 자신의 깍지를 끼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이번 두 달은 별일 없었어요?”
그는 교수의 물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고는 교수의 눈을 보며 말했다.
“마치 가속되는 것 같아요.”
“가속이요?”
“생각만 빨라지고, 난 그 자리에 있어요.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는 기절을 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그 증상이 사라졌어요.”
그는 교수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교수가 모니터를 보며 그를 향해 다시 말을 이었을 때, 그는 어깨의 힘을 뺐다.
“약을 늘려보죠.”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웃는 얼굴로 눈을 슬며시 감으며 말했다.
“버텨 보겠습니다. 약은 이대로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봐 주세요.”
“지금의 량도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에요. 아주 소량의 약이에요. 늘린다고 문제 될 것은 없어요.”
“이번 만, 다시 기다려 봐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그는 헤실헤실 웃으며 교수에게 말했고, 교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달 후, 괜찮으시겠나요?”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는 진료실을 나와 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예약 시간은 10시 00분
진료 시작 시간은 10시 27분
진료를 마치고 나온 시간은 10시 32분
그는 주머니에 있던 메모지를 구겨 쥐며 간호사에게 인사한 후, 다시 예약 일을 잡고 병원을 나섰다.
약국에 들러 약을 받은 그는 작은 가방 안에 약들을 담고 다시 병원으로 가서 환자대기실의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한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되돌리기를 반복하던 그는 손목에 감겨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12시가 된 것을 본 그는 몸을 일으켜 병원 주변에 있는 돈가스 전문점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친 그는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잠시 서성이더니, 걸음을 옮겨 택시가 줄 서 있는 곳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네~. 어디로 가십니까?”
“시외버스 터미널 부탁드립니다.”
뒷좌석에 앉아 벨트를 맨 그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한 페이지에 눈을 집중 한 채 머리를 숙였다.
“병원은 잘 다녀왔어요? 병문안이라고 하더니 친구 분은 심하게 다치진 않았고요?”
택시 기사의 말에 그는 고개를 들고 모자를 살짝 들었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를 손으로 훑어 확인한 그는 택시 기사의 얼굴을 스윽 본 후,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 들어갈 때 가 대충 9시 넘어서였을 텐데... 이제 나온 걸 보니 점심은 같이 했나 보네. 내가 그래도 기억력은 좋아서 말이야. 뭐, 오늘 손님은... 학생 말고는 없기도 했지만.”
그는 그제 서야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기사에게 답했다.
“네. 오토바이 사고가 있었다네요. 맞은편 차량이 신호를 무시했나 봐요. 친구에게 그토록 오토바이 좀 그만 타라고 했는데, 이젠 정신 차릴지.. 모르겠네요.”
택시 기사가 짧게 웃은 후 말했다.
“그렇구만. 아침에는 많이 심각해 보이더니 지금은 표정이 가벼워진 것 같아. 다행이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있는 마스크를 확인한 후 고개를 숙여 페이지에 시선을 두었다.
“네. 많이는 다치지 않았더라고요. 경미한 타박상하고.. 아, 팔은 깁스를 하고 있었으니 몇 주 입원 하긴 한다 더라고요.”
그는 막힘없이 택시 기사에게 말을 했다.
그는 오늘 친구를 만나지도 않았고, 입원한 친구도 없었지만, 그는 입원한 친구에 대해서 말하며 택시 기사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그는 책의 페이지에 두었던 시선을 손목으로 옮겨 시계를 확인하고 창밖을 슬쩍 본 후, 택시의 요금 리미터를 보고는 지갑을 꺼냈다.
“요 앞 횡단보도 지나서 바로 앞에 세워주세요, 기사님.”
“그래, 학생.”
택시 기사는 차를 세운 후 고개를 돌렸고 그는 택시 기사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몇 장 꺼내 요금보단 잔돈이 조금 더 남도록 돈을 지불했다.
“잔돈은 안 주셔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허허, 고맙네. 조심해서 가, 학생.”
그는 차에서 내리고 횡단보도로 걸어가는 듯하다가 슬며시 눈을 돌려 차의 번호판을 확인했다.
그 번호를 폰의 메모장에 적은 그는 폰을 끄고 신호등이 파란불이 될 때까지 주변의 사람들을 구경하듯 눈동자를 굴렸다.
이내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자 신호등의 불빛을 확인한 후 그도 횡단보도를 건넜다.
표를 끊은 그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외버스가 들어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그는 가방에서 귀걸이 이어폰을 꺼내 귀에 걸었다.
MP3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음악 목록을 훑어본 그는 Megadeth의 Insomnia를 고른 후 틀었고, 오늘만 가방에서 넣었다 빼기를 수십 번은 반복한 책을 다시 꺼내 책갈피가 꽂혀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그 페이지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다시 돌아오지 않고 제대로 넘어가기까지 손이 움직인 횟수는 총 15번이었다.
책 페이지가 온전히 넘어갔을 때 그는 설핏 손목시계를 보았다.
3시 30분.
버스의 출발 시간은 3시 40분이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두리번거렸고,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도착해 있던 버스에 탑승한 그는 제일 뒷좌석에서 한 칸 앞, 창문과 가까운 좌석에 몸을 앉혔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버스 기사가 차표를 걷었고, 버스 기사에게 차표를 건네준 그는 좌석에 몸을 묻고 두 눈을 감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 주변을 휘적였다.
손에 무언가가 잡혔을 때, 그는 눈을 뜨고 그것을 보았다.
그가 풀어놓은 손목시계를 보고 확인 한 시간은 정오를 넘은 12시 20분이었다.
그는 그가 잠들어 있던 시간을 손가락으로 꼽아 본 후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거실로 나왔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을 차려 먹은 그는 자신의 방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서랍 가득 담겨 있는 약 봉투에서 한 봉지를 꺼내 약 내용물을 확인 한 그는 봉지를 찢어 다시 내용물을 확인했다.
트리랩탈 300mg 한알과 반알, 오르필 300mg 한 알.
그는 트리랩탈 반 알은 쓰레기통에 버린 후 나머지 약을 들고 다시 부엌으로 갔다.
약을 입으로 털어 넣고 물 컵에 따라놓은 물을 마셔 삼킨 그는 올라오는 메슥거림에 헛구역질을 두어 번 한 후, 자신의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서랍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낸 그는 담배의 개수를 확인하고 라이터 또한 챙긴 후, 집을 나섰다.
30여분을 걸어 그가 도착한 곳은 사람 한 명 없는, 잡초가 무성한 공원이었다.
나무가 썩어있는 벤치 대신, 공원 앞 강가와 가까운 곳의 돌 위에 몸을 앉힌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돌 위에 놓고 한 개비를 빼낸 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하얀 담배 연기를 머금고 흘려낸 그는 주머니에서 mp3와 이어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걸고 mp3의 목록에서 찾은 것은 Megadeth의 The doctor is calling.
평평한 돌 위에 자신의 상반신을 눕히고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귀에 들려오는 음악이 바뀌었을 때 가볍게 미소 지었다.
넥스트의 Lazenca, Save Us.
웅얼거리던 그는 이내 입을 멈추고는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을 때 표시된 시간은 3시 20분, 그는 몸을 일으켜 공원 주변을 걸었다.
그의 걸음이 집으로 향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발을 잠시 세우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답했다.
그는 어머니의 말에 답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시계가 6시 40분을 가리켰을 때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를 도와 식탁 위에 반찬을 놓고 수저를 놓으며 밥상을 차리던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어머니께 말했다.
“아버지 오셨네요.”
어머니는 피식하고 웃으시며 가스레인지에서 끓고 있던 찌개를 가져와 식탁에 놓으셨다.
그가 밥을 퍼 식탁 위에 놓자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발걸음 소리가 이어지며 이내 어머니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그의 시선이 따라갔을 때, 그곳에는 아버지가 흠뻑 젖은 수건을 목에 걸고 들어오고 계셨다.
“여름도 아닌데, 이렇게 젖어서 되겠나, 어디.”
“어서 오세요, 아버지.”
“손발만 씻고 밥 먼저 먹어. 매운탕 끓여놨어.”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눈웃음을 지어 준 후 고개를 돌리며 표정을 흩트렸다.
그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여름도 아닌데 날 진짜 덥다. 이래가 밥 먹고 살겠나.”
아버지의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아버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날이 안 풀리네요. 가을 중순 되면 괜찮아 질라나 모르겠네요.”
숟가락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선풍기의 소음이 이어지는 짧은 사이, 그는 숟가락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의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연이는 오늘도 늦게 오나?”
“일 마치는 시간이 9시 인걸 그리 말해도 잊어 먹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 그리고 그다음, 그의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
“식아, 엊그제 병원에 의사는 뭐라데?”
그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어머니의 눈을 힐긋 본 후 답했다.
“맨날 똑같죠. 약만 늘리자고 하네요.”
“병원 다시 바까 볼까? 그놈의 병을 나사야 믄 일을 하기라도 할 거 아니가?”
그는 아버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답을 했다.
“병원 바꾼다고 수가 나는 것도 아니고, 지금 가고 있는 병원도 유명한 병원인데, 맨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좀 기다리 봐라. 지금도 약 먹고 있잖아.”
어머니의 말이 멈추고, 그의 왼손 손가락도 멈췄다. 그리고,
“그래가 될 일이가! 다 큰 놈이 일도 안 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데, 믄 낫을 방법을 찾아야지, 기다리기는 뭘 기다리노! 뭐? 간 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병에 일은 안 하고 먹고 놀기만 하는데! 니, 낼부터 아빠 따라 댕기라! 핑계 대지 말고!”
그는 멈췄던 왼손의 검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와 또 그라는데! 아가 아프면 아픈갑다 해 줘야지! 밥 먹는데 와 또 그라노! 내가 이래가 맨날 은친다!”
“에이씨, 이 놈의 집구석! 니! 낼부터 내 따라와라! 다 큰 놈이 자빠지 자기나 하고! 알긋나!”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에게 답했다.
“네, 아버지.”
그는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 밖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예전 달력을 찾아 서랍을 뒤졌다.
2007년 2월 21일에 붉게 칠해진 볼펜 자국은 칠을 하다못해 그날의 숫자를 긁어내 버렸다.
달력이 한 장씩 넘어가며 어떤 날에는 붉은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그곳 아래에는 글자가 써져 있었다.
소 발작, 대 발작, 기절, 전조, 등의 말과 시간을 표시한 듯 한 숫자가 써져 있었다.
달력을 훑어보던 그가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입을 벌리고, 주먹을 쥐지 못한 손가락이 힘을 주어 부들부들 떨린다.
발가락이 움츠러들고, 허리가 숙여지며 머리를 치켜든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이내 그의 숨 속에서 따뜻한 열기가 느껴졌을 때, 그는 뿌드득하고 이빨을 갈고는 방 안에서 누구도 듣지 못할 ‘드드드드드드드...’라는 소리를 내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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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 한 목마름에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한 나는 손과 팔로 상체를 받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의지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은 팔은 자신의 상반신조차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고 난 부들거리는 다리를 끌어올려 몸을 옆으로 뉘어 벽에 손을 짚고 다리를 밀어 겨우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발작을 하고 있을 때 날 억지로 잡고 억누른 사람이 없다는 것에 감사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쯤 전신 근육통에 움직이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을 테니.
물을 마시고 싶었다.
갈증과 함께 느껴지는 요의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통제가 되지 않는 몸의 회복까지 짐작되는 시간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시계가 없었다.
나는, 움직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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