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7)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병원 응급실의 간이침대 위였고, 그의 옆에는 소장이 앉아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본 소장이 그에게 말했다.
“정신 차렸냐?”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소장의 표정에 피로감이 묻어 나왔다.
“사과는 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해라.”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이내 진실을 말했다.
“... 간질을 앓고 있습니다.”
소장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언제부터.”
“지금으로부터 6년 전, 27살부터입니다.”
“그럼 학교에서도 알았겠네.”
“제가 숨겼지만... 그곳에서도 들켰었습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사과는 되었다고 했잖냐.”
“... 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소장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제부터 어쩔래?”
소장의 물음에 그는 소장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네?”
“계속할 거냐고.”
뜬금없는 소장의 말에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의 대답에 시린 음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둬라.”
그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소장님.”
소장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장한테 직원 구하라고 해뒀다.”
“소장님. 한 번만...”
그의 말에 소장의 목소리가 일순간 바뀌었다.
“말 안 바꿀 자신 있냐?”
소장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휙 돌려 소장을 바라보았다.
“네?”
“지금 여기서 너 그만 안 둔다고 하면, 내 옆에서 계속 일 시킬 건데. 도망치지 않고 일할 자신 있냐고.”
“... 네.”
언제부터인지 몰랐지만, 그의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긋해져 있었다.
“또 쓰러져도, 일은 해야 된다. 알고 있지?”
“네.”
“... 가족에게는 연락해 뒀으니 저녁에 병문안 올 거야. 쉬라. 난 사무실 들어간다.”
“... 죄송합니다.”
소장은 눈살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죄송하다는 말. 좀. 함부로 하지 마라. 오늘 네가 일으킨 일들 다른 직원들이 다 나눠서 처리했다.”
“... 감사합니다.”
소장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죄송하다는 말 보단 그 말이 낫긴 하지. 쉬어라.”
소장이 응급실에서 나가고 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슬며시 손을 올려 자신의 귀를 막아 본 후 손을 떼며 인상을 구겼다.
그는 눈을 뜨고 천천히 목을 돌렸다..
눈이 부신 응급실 전등의 빛을 피해 시선을 돌리던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의자에 기대 꾸벅꾸벅 머리를 흔들고 계신 어머니였다.
그리고 이내 응급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그의 아버지.
아버지는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취직은 왜 해서. 이제라도 그만둬라.”
아버지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고 졸고 계시던 어머니 또한 깨웠다.
어머니는 그를 한 번 보고 아버지를 돌아보시고는 얼굴을 구기며 아버지를 끌고 나갔다.
소장은 그에게 3일의 휴가를 줬다.
휴가의 첫날은 자신의 월세 집에서 잠으로 모든 시간을 소모했다.
휴가를 받고 이틀째 되던 날에는 어머니가 반찬거리와 음식을 해서 그에게 왔었지만, 아버지는 1층에서 올라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놓고 내려간 후, 그는 베란다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멀어져 가는 차량 한 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표정 변화 없는 시선으로, 차가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담배를 한 대 더 피운 그는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한글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제목 없음으로 파일을 저장한 그는 한참을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다 한글 프로그램을 닫고 온라인 게임을 실행시켰다.
그의 눈빛에서 감정은 사라지고 방 안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를 딸깍이는 소리만이 가득 채워졌다.
그가 다시 출근을 한 날, 그는 같이 일을 하던 주임이 소장에게 사직서를 내밀었다는 말을 전기과장에게 들었다.
그리고 그날은 처음 관리사무소를 차릴 때 한 회식 이후 두 번째의 회식날이 되었다.
회식의 1차가 끝나고 2차로 노래방에서 도우미들을 불러 놀던 중, 소장은 사직서를 제출한 남자에게 말했다.
“정말 나갈 거야?”
남자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네. 대타 구할 때까지는 있을게요.”
과장은 다음 노래를 선곡하던 중. 리모컨을 놓고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더 좋은데라도 찾았어요? 혹시 기사 땄데요?”
과장의 질문에 그 남자가 아닌 소장이 답했다.
“환자 하고는 같이 일 하기 싫단다. 자기 일 많아진다고.”
과장은 소장의 말에 잠시 멍 한 얼굴이 되더니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별 수 없죠, 뭐.”
소장도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오늘 박 주임 송별회다. 놀자.”
그를 보고 있던, 당직 파트지만 회식을 위해 사무실을 비운 다른 주임이 그에게 담배 한 대 피자며 불러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이미 마음이 떠났다면 같이 일하는 게 더 힘들어. 헤어질 때는 그냥 좋게 헤어지는 게 이롭다는 걸 너도 이젠 알아둬라. 애가 아니잖아.”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있던 그에게 당직 주임이 말했고, 그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참.. 30살도 넘은 우리 막내가 너무 어려서, 귀엽다 귀여워. 너도 털고 인사라도 해. 언제, 어떤 곳에서 마주칠지 모르는 게 사람 사는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말고.”
그는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임에게 한 대만 더 피고 들어가겠다고 말하고는 주임이 당직을 위해 아파트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다.
담배를 물고 있는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쌍욕을 들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2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출근을 한 아침,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소장과 과장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에게 자신만 믿으라며 호쾌하게 말했다.
그는 남자의 뒤에 서 있던 과장을 슬쩍 바라보았지만, 과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그가 알게 된 진실은, 그가 나간 박 주임과 형 동생하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이었다.
하자 신청 기간이 모두 끝나고 산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과 가을의 사이, 그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한 바퀴 돌고 관리사무로 돌아와 시계를 보았다.
자정을 넘은 2시 21분.
그가 층간소음 민원으로 사무실을 나간 시간이 저녁 7시였다.
층간소음 민원으로 실랑이를 벌이다 주차장에 아파트 주차 스티커가 없는 차가 있다며 연락을 받고 찾아서 차주에게 연락한 후, 연세가 높으신 차주 앞에서 말실수 하나로 꼬투리를 잡혀 2시간을 잡혀있으며 시달렸다.
쓰레기 수거장소에 개들이 너무 많다는 민원에 이전에 받아 두었던 개소주 사장에게 연락 후, 기다리다 개 주인이 나타나서 개 목걸이 하시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개가 사람이냐는 말과 함께 우리 집 개는 개 목걸이 차면 갑갑해서 싫어한다는 말을 하며 성큼성큼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 버리는 개 주인.
그는 개소주 사장에게 개 주인을 찾아서 오실 필요가 없어졌다, 죄송하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나둘 반짝이는 별을 찾아보다 이내 고개를 숙인 그는 아파트 단지 내 지상 주차구역 및 시설, 지하주차장의 소방시설 등, 근무할 때 반복적으로 하던 행동 순찰 점검을 마치고서야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컵라면 용기를 보았다.
뚜껑에 올려놓았던 일지를 들어 올린 후 뚜껑을 열어보니 면이 부풀어 빵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면 하나를 들어 올려 보았지만 이내 뚝 끊어져버렸다.
용기를 들어 비스듬히 기울여 젓가락으로 쓸어 입에 넣으니,
라면 소스에 절여져 제법 짭짤해져 있었다.
그는 민원 전화를 받고 나가기 전 냉장고에 넣어둔 김밥 한 줄을 꺼내와 컵라면에 부어 넣더니, 젓가락을 휘적거리며 섞었다.
하지만 불은 면 때문에 잘 섞이지 않자, 그는 불은 면을 젓가락으로 반쯤 퍼 먹은 후 자작 한 라면 국물에 김밥을 풀어 다시 섞었다.
면과 국물과 김밥이 섞인 음식(?)을 붓듯이 입에 넣어 씹어 삼킨 그는 배를 쓸어내리며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폐 깊숙이 빨아들인 그는 길게 숨을 흘려내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음치 박치인 그의 노래 선곡은 김현식의 사랑했어요.
고요한 적막 속에 풀벌레 소리만이 미세하게 들려오는 환청 속에서, 하늘 위로 시선을 돌린 그의 눈에는 전등 빛 하나 없는 검은 하늘에서 별빛 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는 헤실거리며 웃더니 필터까지 빨아들인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불을 끊 후, 재떨이 통에 꽁초를 던져 넣었다.
새벽 4시가 되어 사무실에 배치된 간이침대에 몸을 눕힌 그는 두 눈을 감고 비죽이 웃더니 말했다.
“맛있네, 라면죽.”
3시간이 지나 잠에서 깨어난 그는 관리사무소의 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며 청소를 했다.
잠이 덜 깬 듯 심히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왠지 모르게 개운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