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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woo May 01. 2023

2022년, 종강과 성찰

조금은 암울한 이야기, 그리고 순자.

성찰(省察).

‘사전적인 의미로, 허물이나 저지른 일들을 반성하여 살핌’의 뜻을 갖는 단어이다. 성찰의 성(省)과 찰(察)은 모두 ‘살피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전적 의미보다 기본적인 뜻으로, ‘살피다’라는 두 한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인 것이다. 그러니 성찰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살펴보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그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어야만 한다.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들여다 보는 일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다. 윤동주가 참회의 시를 쓴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나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것은, 시각적인 의미의 ‘보다’의 의미에서 떨어진 행위라는 점이 이에 영향을 주리라 생각한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고 상상한다면 나의 겉모습 하나하나를, ‘내 눈은 이렇구나’, ‘내 코는 이렇구나’하고 살펴보는 것을 떠올릴 수는 없다. 내 겉모습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그 생각을 쫓고, 왜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참회하고, 회고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찰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그러한 성질로 인해 필연적인 불편함을 수반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 현재라고 정의 내린 시간 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현재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현재는 다음 글자를 써내려 갈 시점의 과거일 것이고, 그 전의 글자를 적었던 당시의 미래일 만큼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나의 과거, 나아가 나의 내면을 살펴보는 일은 그러한 추상적인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자, 순간을 순간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의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시간을 돌아보는 것의 한 모습은, 성찰의 모습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성찰은 나의 내면을 하나하나 들춰보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찰이라는 행위는, 물론 미래의 나의 내면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미 존재한 과거의 ‘나’에 대해 겉모습이 아닌 내면까지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미래가 우리에게 가치 있는 만큼, 과거 또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미 지나간 일인데, 생각해서 뭘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하며 과거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시간 속에 일어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혹자는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나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나간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 속의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그 의미가 우리 내면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그 의미가 변한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서 찾은, 한 줄기의 의미가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과거는 쓰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서, 지난 2022년이 그랬던 것 같다. 2022년은 정말 많은 것이 바뀐 한 해였다.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수능이 끝난 그 순간부터 일어난 변화가, 적어도 작년의 내가 느끼기에는, 수능 이전까지의 변화보다도 큰 물결이었던 것 같다. 소중한 인연을 떠나 보낸 만큼 내 곁엔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고, 그렇게 오가는 인연 속에서 느낀 여러가지 감정들은 이제는 어리기만 하진 않는 나 자신에게 있어 이전과는 다른 의미와 향기를 남겼던 것 같다.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젠 과거의 한 페이지로 남은 한 해였다. 이제 이 과거 속에 일어난 일은 변하지 않는다. 그 의미만 내 마음속에서 변화하고 또 변화할 뿐이다. 


비단 ‘관계’속에서만 의미를 찾고 소중함을 느꼈던 한 해는 아닐 것이다. 스무 살.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의 나는 너무도 큰 그들과 이 세상 앞에 잔뜩 겁을 먹었던 한 해였다. 이 글을 적어 내려가며 가장 많은 부분을 고민하고, 또 돌아보며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부분 역시 이 부분이다. 나는 한 해 동안 정말 많은 걱정 속에 둘러 쌓여 있었다. 소중함을 여럿 안겨준 ‘자유’였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어른들의 말이 틀림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정말 많은 걱정과 근심을 내게 안겨주었다. 클리셰(cliché)와도 같은 말이겠지만, 지난 20년간 해야하는 것, 해야만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정해져 있던 삶이 마치 그 이전의 삶은 모래사장 위의 낙서와 같았다며, 한 번의 파도로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파도와 같은 사회 속에 지워져 버린 상황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구분 지어졌던 일들은 오로지 ‘나’의 선택에 따라 다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이었다. 일들 하나하나 이름을 짓고, 의미를 두는 일은, 역시나 처음이었기에 너무도 무거웠던 일이었다. 돌아보면, 욕심이 많았다. 아니, 너무도 소중한 일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도 놓아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3년을 함께한 목표에 대한 열정이란 이름의 집착도, 지난 날의 나에 대한 존중으로 수강한 수업도, 수많은 추억을 함께한 친구도, 이처럼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 것들은 세상 앞에 놓인 나에게서 떠나서는 안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꼭 붙잡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이 시기 쓴 일기장을 펴보면 그 때의 감정마저 생생하다. 


“욕심이라는 것을 정말 잘 알고있다. 그런데 어쩔 수 있겠나. 나에겐 너무 소중한 일들인데. 그 일 하나를 위해 노력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 때의 나였다면, 그 때 만큼 간절할 수만 있다면 욕심 조금만 더 내봐도 괜찮지 않을까”


욕심에 대한 정말 많은 고민을 하던 2022년 10월 말의 일기 중 발췌한 글이다. 정말 놓아주고 싶은 것, 포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내가 안고 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가혹했다. 모든걸 껴안은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는 헌신했지만, 결국 나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찬 바람이 불어 날씨가 쌀쌀 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에 올라와 혼자 살고있던 내 방에 부모님이 찾아오셔서 해주신 말이, 작년을 돌아보는 것이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성찰이자 반성이 될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제서야,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야 큰 파도와 맞서 싸우고 있는 세상 속의 내가 아니라, 그 넓은 품 속에 웅크린, 20년을 그렇게 살았던 작고 연약한 아이로 한 순간에 돌아갔다.


 돌아보면 그랬다. 시간은 연속적이다. 연속적인 시간 아래, 단절은 분명히 아픔을 가져온다. 그 단절은 다른 사람과 헤어진다는 서로의 시간이 더 이상 맞닿아 있음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삶이라는 시간 속에 맞이한 급격하고 위태로운 변화 또한 포함할 것이다. 아무리 혼자만의 싸움을 견뎌내야만 했던 수험 생활이었고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이었지만 그저 나는 부모님 앞에 서면 작은 아이가 되고야 마는, 본질적으론 아직 작은 아이라는 사실을 내 욕심 때문에 잊고 있었다.


 순자가 말한 성악설을 이해하고 나니, 왜 인간의 통제되지 않는 욕심을 순자가 ‘악’으로 규정했는지 이해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순자의 성악은, 인간의 욕심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악으로 규정한 관점인데, 그 의미를 명확하게 가려보면 ‘과(過)’에 가깝다고 이야기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지나친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 본성을 조절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그 욕심의 대가로 무너지게 되었으며, 지금의 성찰을 통해 앞으로 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내 과거에서 찾은 나는 아직 어리다는 의미는, 앞으로 내가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성찰을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이유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지난 내 과거를 통해 이제는 욕심을 조금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아직 어리고 약한 나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나에게도 허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지난 날들에 대한 후회는 아니다. 나는 분명 그때 당시의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그 선택을 했다는 과거의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 선택이 최선의 선택임을 자신있게 믿고 그 선택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의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이 성찰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혼란 속에 놓인 내가 선택한 것을 돌아보고, 또 다른 선택의 기로 앞에서 ‘나’에 근거에 선택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렀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나는 내 지난 한 해에 감사하다.


 혼란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찾는 것. 순자가 천인지분을 주창한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농업 사회에서는 더욱이, 하늘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사회 속에서, 한발짝 떨어져 세상을 바라본 순자는 하늘이 단지 자연일 뿐, 어떤 인식 능력이나 의지, 감정 따위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해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담은 표현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의 의사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즉, 하늘을 그저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순자는 ‘인간은 그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의무를 가졌다. 하늘이 인간에게 메시지를 전한다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메시지를 잘 이해하고 하늘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순자는 하늘이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며, 인간이 하는 말 조차 들을 수 없는 그저 ‘환경’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간이 하늘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순자의 대답은 명쾌하고, 또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말이기도 하다. 순자는 이러한 질문에 “하늘을 따르면서 그것을 찬양하는 것과 하늘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제어하고 이용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라며 되물었다고 한다. 즉, 인간은 인간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늘은 주어진 환경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원리를 알 수 없고 관여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한 하늘의 일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사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영역과 일에 먼저 관심을 가지고 힘을 쏟자는 이야기를 순자는 전한다.


하늘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제어하는 것. 가뭄에 대비해 물을 가둬 저수지를 만들고 홍수에 대비에 둑을 쌓는 것.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어찌할 수 없는 앞으로의 주어진 환경을 대비하는 것. 내가 지난 한 해를 성찰하며 배운 것과 맞닿아 있는 생각이라고 여긴다. 차이가 있다면, 순자가 생각한 하늘과 인간의 관계는 자연과 사람의 관계로 귀결되어 하늘의 일은 사람의 일과 명확히 구분되기에 하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래와 현재가 상호작용 하는 관계는 이와 다르다. 미래의 현재는 과거이고, 과거의 미래는 현재이다. 연속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순자의 천론(天論)과는 다르다. 그러나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메시지에서는 같다. 순자가 하늘과 인간을 구분한 이유는, ‘인간이 노력하여 하늘을 정복하자’ 따위의 메시지가 아니다. 서로 구분되는 이 두 대상의 조화를 지향한 것이다. 그 조화의 목적은 사람들의 행복과 세상의 안정에 달렸으며, 순자에게 그 행복과 안정의 달성 여부는 끊임없는 노력에 달려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서로 구분되는 대상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은 설득이 필요하기에 순자가 천론을 주장한 일이겠지만, 나의 경우 연속적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조화는 설득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위에서 분절이 일어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고통이 따르는 일인 것과 동시에 태초에 하나였던 대상이기 때문에 조화를 이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순자가 천인지분을 주장하며 주어진 환경 속 최선을 다할 것을 주장한 만큼, 나 역시 과거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성찰을 통해 마주하는 과거의 나를 대하는 나의 자세에 관한 메시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현재의 나에게, 과거는 이미 주어진 하나의 자산이다. 내가 이 과거를 대하는 자세는, “내가 왜 그랬을까.”, “다른 길을 갔더라면 내가 지금 이 지경은 아니었을 텐데!” 등의 후회와 한탄이 될 수 없다. 과거는 선택의 상황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가 걸어간 길을 바라보며, 그 속에 담긴 내면까지 하나하나 짚어볼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자료인 것이다. 이 과거를, 순자가 하늘을 바라보며 그러했듯, 하나의 주어진 환경으로 생각하며 끊임없이 발전하려 노력하고, 지난날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 위에 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노력 할 것을 다짐하며, 글을 마친다.


참고

배기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순자: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EBS BOOKS, 202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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