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13분.
폰 내비게이션 소리가 거슬렸다.
“500미터 앞 우회전입니다. 제한 속도 50킬로미터 구간입니다.”
시끄럽다. 운전은 내가 하는데 왜 얘가 더 난리일까.
그냥 좀 조용히 가면 안 되나. 한숨이 나왔다.
수많은 소리 중에 내비 목소리만 유독 거슬렸다.
피곤해서 그런가. 아니, 원래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다.
폰 음량을 줄였다. 그래도 그 목소리는 기어코 들렸다.
이놈의 내비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까?
가끔은 이 똑똑한 기계보다 사람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사람은 눈치라도 보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초췌했다.
아, 진짜 피곤하다. 주말에도 이렇게 일하다니. 직장인의 삶이란. 한숨이 또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살아가지만, 정작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냥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기분이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겠지.
‘나만 힘든가?’ 이 질문은 이미 식상하다. 답도 없는 질문이니까.
수많은 소리 속에 너의 목소리
그를 처음 만난 건 번화가 한복판이었다.
친구들 생일 파티에 끌려갔다가 정신없이 떠드는 인싸들 틈에 끼어 있었다.
시끄럽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야, 더 시켜!” “여기 노래 좋다!” 온갖 소리가 뒤섞여 귀를 때렸다.
나는 그냥 구석에 앉아 폰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여기 왜 있지? 현타가 왔다.
그때, 저 멀리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렷했다.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대화하기가 힘드네요.”
그는 큰 소리를 내지 않고도, 주변 소음에 묻히지 않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에 다들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민망한 듯 표정도 금세 사라지고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의 시선이 그에게로 갔다. 수많은 소리 중에 그의 목소리만 유독 들렸다.
왠지 모르게 끌렸다. 조용하면서도 존재감 있는 사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파티에서 나처럼 겉돌고 있었다. 그냥 친구 따라온 거였다.
우리는 그렇게 첫 대화를 시작했다.
시끄러운 파티장에서 조용한 우리 둘은 왠지 모르게 동질감을 느꼈다.
어색함도 잠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주변 소음은 점점 사라지고, 그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과 대화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너의 모습
그 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시끄러운 술집 대신 조용한 카페나 한적한 공원에서 만났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었다.
심야영화를 보며 밤을 새우고, 동네 맛집을 찾아다니며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만 보였다.
지하철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여도, 그의 얼굴만 또렷했다.
마치 내 눈에 필터가 씌워진 것처럼, 그는 늘 나에게 특별했다.
어느 날, 그와 함께 쇼핑몰에 갔다. 주말이라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원래 나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다.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표정이 굳어가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힘들어? 우리 그냥 나갈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사람들을 헤치며 밖으로 나섰다.
그때 깨달았다. 그는 나의 내비게이션과 달랐다. 내 속도를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주고 맞춰주려 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그는 나를 가장 먼저 알아봐 주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그렇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옆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가면, 멀리 있어도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그의 모습은 늘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목소리도 그랬다.
다른 소리들이 아무리 커도, 그의 목소리는 늘 나에게 제일 먼저 들렸다.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라
그는 나에게 늘 편안함을 줬다. 무슨 일이든 나눌 수 있었다.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그에게 연락했다.
그는 늘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줬다.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줬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라. 그는 항상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는 따뜻한 차를 건네며 말했다.
"말 안 해도 돼. 그냥 옆에 있을게." 그 한마디가 너무 고마웠다.
나는 그에게 내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꾸밈없는 나, 완벽하지 않은 나, 때로는 짜증 내는 나까지도.
그는 그런 나를 모두 받아줬다. 나는 그에게 나를 숨기지 않았다. 숨길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첫눈에 반하는 뜨거운 사랑은 아니었다. 격정적인 감정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모습을 찾으며. 그는 내 삶의 조용한 배경 음악 같았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없으면 허전하고 그리운.
나를 힘들게 하는 내비게이션 목소리 대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잔잔한 멜로디 같았다.
언제나 열린 팔
어느 날, 내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
"넌 나 처음 봤을 때 어땠어?"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음… 그냥 시끄러운 곳에서 혼자 조용히 있는 게 인상적이었어. 왠지 모르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어."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나도 같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한 무리의 새 떼가 줄을 지어 날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린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조용한 존재감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나는 여전히 시끄러운 곳을 싫어한다.
내비게이션 목소리도 때로는 거슬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수많은 소리 속에 나를 위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위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나의 팔은 언제나 열려있다. 그런 나의 가슴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이제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알아봐 주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수많은 소리를 듣는다.
그중에서 정말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은 몇이나 될까?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와 모습에 압도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건 아닐까?
때로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를 위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나를 알아봐 주는 모습을 찾아야 한다.
나는 폰을 들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뭐 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의 답장이 바로 떴다.
"5분 후에 전화할게."
내비게이션은 여전히 시끄럽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세상 모든 소음은 잠시 멈춘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향해 언제나 열려 있는 팔이 되어줄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