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것들

by 이로

새벽 1시 37분.

침대에 누워 새로 산 스니커즈를 본다.

예쁘긴 한데 뭔가 어색하다. 발에 착 감기는 느낌이 아니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서겠지.

신발을 신다 보면 길들여진다. 내 발이 신발에, 신발이 내 발에.

며칠 신다 보면 내 발 모양에 맞춰서 주름도 생기고, 발바닥도 편안해질 거다.

새 신발의 뻣뻣함이 사라지고,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옷도 그렇다.

처음엔 낯설다. 뻣뻣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몇 번 입고 세탁하다 보면 내 몸에 맞게 부드러워진다.

주름도 자연스럽게 잡히고, 어깨선도 내 체형에 맞춰진다.

내 몸이 옷에, 옷이 내 몸에. 입을수록 편안해지고,

심지어는 옷 때문에 내가 더 멋있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건 내 착각일 확률이 높다.

그냥 내가 스스로에게 해주는 위로 같은 거다.


문득,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 나는 솔직히 믿지 않는다.

첫인상에 강하게 끌릴 순 있어도, 그게 전부는 아니다.

콩깍지가 씐 걸 수도 있고, 순간적인 착각일 수도 있다.

진짜 '반하는' 건 천천히 스며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신발과 옷이 내게 길들여지듯.


그를 처음 만난 건 작년 가을, 교양 수업이었다.

복학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싸처럼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늘 혼자였다. 말수도 적고, 조용했다.

첫인상은 그냥 ‘무심한 애’ 정도? 특별히 눈길이 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좀 시크해 보였다.

발표 조를 짜면서 어쩌다 보니 그와 같은 조가 됐다.

처음엔 어색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카톡으로 연락하다가, 자료를 공유하다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횟수가 늘었다.

도서관에서 함께 밤을 새우고, 과제 때문에 편의점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피곤해서 넋이 나간 나를 보며 그가 웃으며 말했다.

"밤샘은 국룰이지. 김밥은 내 최애 메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벽처럼 느껴지던 그의 모습에 작은 틈이 생기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밤샘 과제를 마치고 새벽에 헤어지려는데 비가 쏟아졌다.

우산이 없었다. 그가 말없이 자기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두 명이 쓰긴 좀 작겠다”며 내게 무심한 듯 우산을 건넸다.

그러더니 자기는 모자를 눌러썼다.

"난 모자 썼으니 괜찮아."

그 순간, 무심한 줄만 알았던 그의 모습 뒤에 숨겨진 배려심을 보았다.

마치 뻣뻣했던 새 옷이 내 몸에 맞춰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스며들었다.

나는 그의 말수가 적은 점이 진중하다고 느꼈고,

그가 차가워 보였던 모습이 사실은 섬세한 배려였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도 내 털털함 뒤에 숨겨진 허당미를 발견하고는 자주 웃었다.

"너는 꼭 시트콤 주인공 같아." 그의 말에 발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서로의 취향을 맞춰가는 게 어려웠다.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그는 달콤한 걸 좋아했다.

나는 액티비티를 즐기고, 그는 집에서 넷플릭스 보는 걸 선호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취향에 맞춰갔다.

매운 떡볶이를 먹고 나면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러 갔고,

운동장을 뛰고 나면 조용히 영화를 보며 쉬었다.

서로의 발에 맞춰 새 신발이 길들여지듯, 우리의 관계도 그렇게 맞춰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가 피곤해 보이면 먼저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내가 뭔가 고민하고 있으면 그는 말없이 옆에 앉아 기다려줬다.

첫눈에 반했다는 격정적인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천천히, 그리고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발에 꼭 맞는 편안한 신발처럼, 몸에 착 감기는 익숙한 옷처럼.


물론 모든 관계가 완벽할 수는 없다.

때로는 신발이 발을 아프게 할 때도 있고, 옷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싸우기도 하고, 서운한 감정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천천히 우리의 관계를 돌아봤다.

처음부터 완벽한 신발이 어디 있겠어?

완벽한 옷도 없지. 다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한 거다.

가장 좋았던 점은, 우리는 서로에게 솔직했다는 것이다.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했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털어놨다.

애써 포장하지도 꾸미지도 않았다.

마치 새 옷을 빨고 입으며 내 몸에 맞춰가듯, 서로에게 맞춰가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했다.

그리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썼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들은 첫눈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을 꿈꾼다. 나도 예전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불꽃은 금방 타오르고, 금방 사그라든다.

진짜는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다. 보이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네가 내 마음에, 내가 네 마음에.

그렇게 서로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더 깊이 스며들어 서로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제 그는 내게 단순한 남자친구가 아니다.

가장 편안한 친구이자,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마치 오래된 신발처럼, 발에 착 감겨 어디든 함께 갈 수 있는. 오래된 옷처럼,

몸에 착 붙어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함을 주는.

가끔 그가 묻는다. "나 처음 봤을 때 어땠어?"

나는 장난스럽게 답한다. "음... 그냥 그랬지 뭐. 특별하진 않았어." 그가 말한다.

"나도 그랬어. 물론 네가 날 이렇게 만들 줄도 몰랐지." 우리는 함께 웃는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안 믿지만, 이젠 서로에게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걸 안다.

우리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을 거다. 계절이 서로 물고 물리며 계속되듯이.

여름이 가을을 부르고, 가을이 겨울을 부르고, 다시 봄을 부르듯이.

우리는 서로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 계속해서 함께할 거다.

처음 만났던 하얀 겨울처럼 순수하게, 봄의 꽃처럼 아름답게,

여름의 태양처럼 뜨겁게, 가을의 낙엽처럼 깊은 추억을 만들며.

그리고 다가올 겨울에는, 다시 서로에게 눈꽃처럼 다가갈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스니커즈를 신고 몇 걸음 걸어본다.

처음보다는 확실히 편안하다.

내 발에 맞춰 길들여지고 있다.

사람도 그렇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한 관계도 없다.

그저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들고,

서로를 길들여 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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