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가기

by 이로

새벽 3시 17분.

폰 화면에 뜬 카톡을 읽었다.

“우리 그만하자.”

짧고 굵은 한 문장. 딱 그 사람 스타일이었다.

읽씹을 할까, 답장을 할까 잠시 고민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폰을 던져두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 사람이 떠났다.

내 인생에서 그 흔적을 지우려는 듯 깔끔하게 사라졌다.

드라마처럼 울고불고 매달리지도 않았다.

넷플릭스 멜로물 여주인공처럼 비 맞으며 주저앉아 오열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불속에 파묻혔을 뿐이다. 슬프지도 않았다.

아쉽지도 않았다. 오히려 해방감? 글쎄,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미건조했다.


아침에 눈을 떴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늦잠은 국룰이지.

어제 꾼 꿈도 기억이 안 났다. 그냥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습관처럼 폰을 들었다.

알림 창에 뜬 그의 마지막 카톡을 다시 봤다. 여전히 무감각했다.

‘나 진짜 괜찮은 건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별하면 폭풍 오열을 하거나, 술에 쩔어 살거나,

아니면 새로운 사람을 찾아 떠나던데. 난 그냥 멀쩡했다.

쿨병에 걸린 건가 싶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

그 사람과 사귄 지 2년.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연애 초반엔 불꽃 튀었다. 매일같이 연락하고, 주말엔 꼭 만났다.

밥 먹고 영화 보고, 가끔 교외로 드라이브도 갔다.

남들 하는 거랑 똑같이 했다. 손만 잡아도 설레고,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났다.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루틴이 됐다.

주말에 만나 밥 먹고 카페 가는 게 전부였다.

새로운 곳을 가자고 해도 귀찮아했다. “그냥 평소 가던 데 가자. 거기가 편하잖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나도 딱히 새로운 걸 원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뒀다.

연락 횟수는 줄었고, 대화 내용은 뻔해졌다.

“밥 먹었어?”

“응.”

“오늘 뭐 했어?”

“그냥.”


가끔 다른 커플들을 보면 부러웠다.

작은 일에도 행복해하고, 서로를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모습이.

우리는 그런 게 없었다. 특별한 날에도 그냥 밥이나 먹고 끝이었다.

나도 그랬고, 그 사람도 그랬다. 서로에게 노력을 하지 않았다.

아니, 노력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냥 존재했다. 나란히, 각자의 삶을 살았다.

함께 있지만, 함께가 아니었다. 묘한 평행선이었다.


이별의 예고편

사실 헤어짐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싸우지도 않았다. 다툴 일조차 없었다.

서로에게 기대하는 게 없었으니까.

한 달 전쯤이었나. 친구들이

“너희 요즘 왜 이렇게 밍밍해? 권태기야?”라고 물었다.

나는 대충 웃어넘겼다. ‘권태기? 권태기라 부를 만한 감정이나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의 대화는 늘 단답형이었다.

“뭐 해?”

“아무것도.”

“밥 먹자.”

“어.”

감정 없는 이모티콘처럼 우리 관계도 그렇게 변해갔다.

영화를 봐도 감흥이 없었고, 맛있는 걸 먹어도 그냥 그랬다.

손을 잡아도, 포옹을 해도 아무런 떨림이 없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 같았다. 아니, 친구보다 못한 사이였다.

친구는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내 기분을 살피지 않나.

우리는 그냥 옆에 있었다. 그게 다였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가 너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아니, 환상 자체가 사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요즘 연인들이 다 그렇다던데, 우리만 그런 건 아닐 거다.

너무 현실적이라서,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

오히려 깊은 감정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거다.

상처받기 싫어서 미리 방어막을 쳤던 건 아닐까.

차라리 다행일지도.


밤이 되자 배가 고팠다.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시켜 먹고 남은 치킨이 보였다.

차가운 치킨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안 났다. 이별 때문인가?

아니, 그냥 배가 고파서 먹는 거였다.

이별 따위가 내 식욕을 막을 순 없지. 쩝.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려고 만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이러지 않기 위해 떠난다.’

그 사람의 마지막 카톡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말이 너무나도 정확해서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대로 지루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싫었던 거다.

설렘도, 애틋함도, 싸움도 없는 이 밍밍한 관계를.

그 사람은 나에게서 특별한 감정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나도 그 사람에게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악도 아니었고, 최고도 아니었다.

그냥 서로의 옆에 잠시 머물렀던 스쳐가는 인연 같은 거였다.

감정 소모도 없었고, 에너지 소비도 없었다.

그러니 이별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다시, 나로 돌아가는 길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꽃잎 하나 흩날리지 않았다. 그냥 조용했다.

이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무미건조할 수 있다니.

오히려 내가 좀 이상한 건가 싶었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인가?

아니면 쿨한 척하는 위선인가? 잘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괜찮다. 아쉬움도, 괴로움도 들지 않는다.

잘 가라는 말 한마디도 남기고 싶지 않다.

왜? 굳이? 그는 그냥 원래 왔던 길로 돌아간 것뿐이다.

나도 이제 내 길을 가면 된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 길은 잠시 멈췄을 뿐이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이별은 아프고 슬픈 거라고 배웠는데, 나의 이별은 달랐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이별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쩌면 이게 진짜 이별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연출 없이, 그냥 덤덤하게 끝나는.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았고, 받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까지였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뭐 할까. 밀린 드라마나 볼까.

아니면 친구들이랑 밥 먹고 수다나 떨까.

‘쿨병이든 아니든, 일단 내일 할 일이나 생각하자.’ 머리맡에 놓인 폰이 울렸다.

새로운 카톡이었다. 친구였다.

"야, 솔로하고 좀 놀아줘! 밥 사줄게."

답장을 보냈다. "한 명 더 추가요."

그래,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이별이라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거나, 내가 완전히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이전의 나로, 더도 덜도 말고 딱 나로.

그러면서도 아주 미세하게, 뭔가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알 수 없는 기대감.

이 정도면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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