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가고

by 이로

새벽 공기가 아직 차가웠던 며칠 전과는 달랐다.

창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기운이 확 끼쳐왔다.

코끝에 닿는 습한 공기가 어쩐지 낯설었다.

아, 봄이 기어이 가는구나.

화려했던 벚꽃잎들이 진작 떨어져 버린 길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왠지 모르게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매년 겪는 일인데도, 이별은 늘 새롭다.

봄은 왜 그리 서두르는 걸까? 늘 뒷모습만 보여주는 재주가 있다.

마치 나에게 "다음에 또 보자!" 하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친구처럼.


하지만 봄은 결코 혼자 사라지지 않는다.

여름의 뜨거운 앞자락을 슬며시 물고 온다.

아스팔트 위로는 벌써 아지랑이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낮에는 걸을 때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봄은 그렇게 여름을 슬쩍 얹어놓고, 자신의 연두색 뒷자락을 조용히 거두어간다.

참 영리한 계절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제때 물러설 줄 아는 지혜랄까.

계절은 그렇게 서로 물고 물린다.

여름은 가을을, 가을은 겨울을, 겨울은 다시 봄을.

그 흐름 속에 단 한순간의 끊김도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꾸준함과 이어짐의 미학을 가르쳐준다.

물론 우리가 그걸 제대로 배우는지는 늘 의문이지만,

적어도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마치 계절처럼, 우리 또한 서로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나는 문득 그를 떠올렸다.

하얀 눈꽃이 흩날리던 차가운 겨울날,

작은 골목길 끝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의 모습.

목도리에 반쯤 파묻힌 얼굴이 얼핏 보였다.

창밖에서는 눈발이 흩날렸고, 따스한 차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이렇게 긴 이야기가 될 줄 몰랐다.

그저 스쳐 가는 인연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었다.


봄이 오자, 우리는 화사한 꽃처럼 설렘 가득한 웃음으로 피어났다.

어색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연두색 새싹처럼 돋아났다.

길가의 개나리처럼 노랗고 밝았다.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배를 잡고 웃었다.

어쩌면 그게 관계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서로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우리는 열정적인 에너지로 서로를 비췄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마치 우리 심장 소리 같았다.

뜨거운 차 대신 시원한 아이스 티를 앞에 두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눴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대화에 리듬을 더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개의치 않았다.

서로의 꿈을 응원했고, 때로는 무모한 도전을 함께했다.

세상이 온통 우리 둘의 무대 같았다.

뜨거운 여름밤, 별이 쏟아지던 바닷가에서 서로의 어깨에 기대었던 순간도 선명하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서로의 마음은 고즈넉한 낙엽처럼 차분하게 채워졌다.

시끄러운 술집 대신 조용한 전시회를 찾았다.

오래된 책방에서 먼지 쌓인 책들을 함께 뒤적거렸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계절이 주는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꽤 근사한 경험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간은, 세상의 어떤 시끄러운 소음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고, 그는 변함없이 하얀 눈꽃처럼 내게 다가왔다.

어쩌면 겨울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계절인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용하고 순수한 시간이 흐른다.

서로의 온기로 차가운 손을 녹여주며 눈 내리는 창밖을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들고, 서로의 일부가 된다.

내가 던진 작은 돌멩이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듯, 나의 작은 행동과 말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가령, 무심코 건넨 '힘내세요' 한마디가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다시 일어설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다.

또 그들의 반응이 나에게 되돌아온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고, 배우고, 성장한다.

한 사람의 미소가 다른 사람의 하루를 밝히고, 따뜻한 한마디가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가.

우리는 혼자서는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세상은 홀로 존재하는 섬이 아니다.

우리는 거대한 대륙의 일부처럼 서로 맞닿아 살아간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이름 모를 사람,

잠시 눈을 마주친 편의점 점원,

혹은 내가 쓴 짧은 글을 읽어준 당신.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이 때로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 작고 보이지 않는 끈들이 모여, 거대한 관계의 그물망을 이룬다.

마치 겨울 숲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서로를 기대듯.

봄이 간다고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스쳐 가는 계절이 아니다.

서로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 계속해서 변화하고, 또 다른 아름다움을 피워낼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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