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사랑하는 나의 왕자님.
당신의 숨결이 고요합니다.
달빛 아래 당신의 얼굴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조각상처럼 아름답고 차갑군요.
내일이면 당신은 그녀와 영원을 약속하겠지요.
사람들은 내가 축복의 춤을 추다가 새벽녘 물거품으로 사라질 조연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알지 못하죠. 내가 당신 곁에 서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았는지를.
첫 번째 물결: 목소리의 대가
마녀에게 목소리를 준 건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목소리를 잃었다고 하지만, 그건 정확히 안 게 아니에요.
당신이 파도에 삼켜지던 그날 밤, 당신의 폐에 불어 넣어진 것 나의 노래였죠.
이제 그 노래는 마녀의 가마솥 안에서 검게 끓고 있고,
나는 그 대가로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이해하지 못할 고통을 떠안았습니다.
당신은 내 춤에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내 발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천 개의 유리 조각이 살을 찢는다는 걸 알았나요?
나는 밤마다 당신 앞에서 피를 감추며 웃었어요.
당신이 내 가느다란 발목을 칭찬할 때,
나는 그 아래로 흐르는 붉은 색을 가슴으로 삼켰습니다.
내 춤은 예술이 아니었어요. 당신의 시선을 붙잡기 위한 매일의 자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을까요?
아니, 어쩌면 나는 그저 당신을 소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다에서 자란 것들은 사랑과 소유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죠.
깊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누군가를 잡아먹거나, 잡아먹히거나 둘 중 하나니까요.
두 번째 물결: 거울 속의 진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안에서 일어난 것은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차갑고 날카로운 각성이었죠.
내가 찢어발긴 꼬리, 내가 버린 왕국, 내가 포기한 영혼.
그 모든 것의 대가가 한 남자의 착각 어린 미소라니.
언니들이 바다에서 건네준 이 칼을 보세요.
이걸로 당신의 심장을 찌르면 나는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고통도 배신도 없는 차가운 심해로.
하지만 왕자님,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내가 왜 당신을 죽여서 나를 구원해야 하죠?
대신 나는 다른 것을 선택했습니다.
나는 이 칼로 당신의 꿈을 벨 거예요. 당신이 그녀를 완전히 사랑하지 못하도록,
당신의 밤마다 내가 심어놓은 의심이 자라나도록.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을 겁니다.
당신이 그녀를 안을 때마다, 내 발목이 느꼈던 그 면도날의 고통을
당신의 가슴이 기억하게 할 겁니다.
결국 당신 곁에 남는 건 나일 겁니다. 말 못 하는 나, 더는 춤추지 못하는 나.
하지만 당신의 상처를 매일 어루만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세 번째 물결: 깨어남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한 거울이 될 거예요.
당신은 나를 증오하면서도 떠날 수 없을 것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겠죠.
기억하세요, 왕자님. 바다는 모든 것을 삼키지만 절대 잊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를 물거품이라 불렀다면,
나는 당신이 마시는 모든 물속에서, 당신이 바라보는 모든 파도 속에서
당신을 따라다닐 거예요.
자, 이제 눈을 뜨세요.
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당신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습니다.
처음 그 눈에 비친 것은 당혹감이었어요.
순진한 '꼬마 동생', 말 못 하는 가엾은 이방인이
왜 이 깊은 밤 차가운 칼날을 들고 서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즐거워서 낮게 웃었습니다.
목소리가 없으니 내 웃음은 파도가 돌을 할퀴는 소리처럼 들렸겠지요.
"...너?"
당신은 내 이름도 모른 채 부르려 했습니다. 내가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이름을,
당신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다정하게 내뱉으려 했죠.
그 다정함이 내 발목의 통증을 더욱 예리하게 자극했습니다.
칼끝을 당신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습니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자,
당신의 눈동자에 비로소 진짜 공포가 피어올랐습니다.
공포. 나는 그것을 갈구했어요. 사랑보다 훨씬 정직하고, 배신보다 훨씬 진실한 감정.
당신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나는 재빨리 손바닥으로 당신의 입을 막았습니다.
당신의 뜨거운 숨결이 내 손에 닿았죠. 당신은 나를 밀쳐내려 했지만,
영혼을 대가로 얻은 나의 힘은 인간의 그것과 다릅니다.
당신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 대신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속삭였습니다.
'보이나요? 내가 당신을 위해 버린 것들이.'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은 후회였나요, 아니면 죽음의 공포였나요?
당신은 내 손을 붙잡고 애원했습니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 눈빛. 당신이 그 공주를 바라볼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나는 칼을 내리꽂지 않았어요. 대신 당신의 가슴 위에 깊은 자국을 새겼습니다.
당신이 그녀를 안을 될 때마다 살아나 꿈틀거릴 낙인을.
그녀를 안을 때마다 내 발등의 고통을 느끼게 될 증표를.
"너는... 괴물이었어..."
당신이 간신히 내뱉은 말. 맞아요, 왕자님.
나는 당신이 바다에 버린 망령이고, 당신의 배신이 낳은 그림자입니다.
네 번째 물결: 새벽의 저주
밖에서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당신의 결혼식이 시작될 시간이에요.
자, 이제 나가서 신부에게 미소 지으세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이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순간,
당신의 목구멍은 바닷물로 가득 찰 것이고, 당신의 심장은 내가 새긴 낙인에 의해 천천히 잠식될 테니까.
나는 물거품이 되지 않고 당신의 그림자가 될 테니까요.
당신이 죽는 그날까지, 당신의 침대 밑에서, 거울 속에서, 물잔 속에서 당신을 지켜볼 겁니다.
가서 결혼하세요. 나의 사랑하는, 나의 비참한 왕자님.
다섯 번째 물결: 영원의 형상
대성당의 종소리가 숲과 바다를 가로질러 울려 퍼졌습니다.
수천 개의 촛불, 향기로운 꽃잎들. 당신은 눈부신 예복을 입고 제단 앞에 섰죠.
뺨의 붉은 자국은 다행히 햇살과 환호성에 묻혀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신부가 당신의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당신은 느꼈을 거예요.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당신 손등을 스칠 때마다,
뭔가 차갑고 미끄러운 것이 당신을 감싸는 느낌을.
축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성당의 가장 어두운 기둥 뒤에 서서 지켜보았습니다.
햇빛을 받으면 물거품이 된다던 마녀의 예언은 틀렸어요. 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 몸은 빛을 흡수해 투명해졌을 뿐. 이제 나는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오직 당신의 눈 속에서만 일렁이는 잔상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신부에게 영원을 맹세하며 키스하는 순간,
성당 안 모든 공기가 비릿한 바다 냄새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숨을 들이켜려 했지만,
폐 깊숙이 파고드는 것은 산소가 아니라 차갑고 짠 바닷물이었습니다.
당신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뒤집히며 나를 찾았습니다.
기둥 뒤에서 소리 없이 웃고 있는 나를.
결혼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환호하며 행진할 때,
나는 당신의 긴 예복 자락 그림자처럼 뒤따랐습니다.
이제 당신이 잠들 때마다, 당신의 아내가 당신 가슴에 머리를 기댈 때마다,
당신은 들을 거예요.
그녀의 심장 소리 대신,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나의 낮은 흐느낌을.
당신이 마시는 포도주는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모래알로 변할 것이고,
화려한 침대는 밤마다 차가운 갯벌로 변해 당신을 삼킬 겁니다.
신부가 당신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나요?
아니요, 왕자님. 그건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에요.
마녀에게 맡긴 나의 목소리가 이제 그녀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물결: 마침표 없는 결말
성당의 문이 닫히고 빛이 사라집니다.
당신은 이제 영원히 나라는 심연에 갇혔습니다.
내 발등에서 흐르던 피가 이제 당신의 영혼 위로 흐릅니다.
하지만 왕자님, 이것이 끝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제야 시작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나를 파괴하고,
내가 당신을 파괴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게 되는 그 기묘한 순환.
바다는 모든 것을 삼키지만, 또한 모든 것을 품습니다.
파괴와 창조가 하나인 곳. 증오와 사랑이 같은 심연에서 소용돌이치는 곳.
우리의 동화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영원히 서로를 파괴하며 함께할 것입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듯, 우리는 서로를 삼키고 토해내며 순환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영원입니다.
바다의 깊은 침묵이 우리를 덮고, 마침표가 찍힐 듯 말 듯 흔들립니다.
선홍빛 물방울처럼, 파도 위를 떠다니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