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후였어. 딱히 할 일도 없었지. 그냥 시내 대형서점으로 향했어.
주말에 약속 없으면 으레 그랬거든. 괜히 사람 구경도 하고, 책 냄새도 맡고. 그게 내 소소한 낙이었어.
그날따라 서점은 묘하게 한산했어. 다들 어디 좋은 데 놀러 갔나 봐.
덕분에 나는 무슨 서점 전세 낸 사람 같았지. 여유롭게 돌아다녔어.
에세이 코너를 어슬렁거리는데, 유독 하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어.
제목이 '사라짐의 기술'이래. '크, 제목 한번 기갈나게 뽑았네.' 속으로 중얼거렸어.
무심코 책을 꺼내 들었지.
근데. 와. 작가 이름을 본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어.
10년 전에 헤어진, 내 첫사랑 이름이 거기에 있는 거야. 진짜로. 거짓말 아니고. 걔가 책을 냈더라고.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부터 나온다더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 있었으면 분명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을 거야.
걔랑 나, 우리 딴에는 참 쿨하게 헤어졌었어.
강남역 스타벅스 통유리창 앞에 앉아서.
"네가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딴 닭살 돋는 대사나 치면서 말이야.
지금 생각하면 그게 무슨 쿨함이야. 그냥 겁쟁이들이었지.
관계가 망가지는 걸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괜찮은 척, 어른스러운 척 연기했던 거잖아.
걔는 모든 걸 열심히 하던 애였어. 사랑도 무슨 프로젝트처럼. 계획하고, 실행하고, 결과를 분석하고.
그땐 그게 참 멋있어 보였어. 반짝반짝 빛나 보였거든.
근데 이 책을 딱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나도 걔 인생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겠구나.'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깔끔하게 '완료' 처리된 프로젝트. 좀 찝찝한 완료였지만.
책날개를 봤어. "베를린에서 고양이와 함께 산다"라고 쓰여 있었지.
그래, 잘 사네. 내 인스타그램은 차단했으면서, 이렇게 책으로 근황을 전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
베를린, 고양이, 작가. 참, 걔가 딱 좋아할 만한 조합이야.
10년이 지나도 사람은 진짜 안 변하나 봐. 그 특유의 자기애 넘치는 취향은 여전했어.
궁금해서 책을 몇 장 넘겨봤어.
근데 이거 봐라? 페이지마다 내 흑역사가 아주 문학적으로 승화돼서 펼쳐져 있는 거야.
우리가 같이 갔던 동해 바다, 내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던 얘기,
서로의 서툰 점을 보듬어줬던 그 모든 순간들이 활자가 돼서 박혀 있었어.
물론 내 이름은 없지. 그냥 '그'라고만 되어 있더라.
나는 그 책 안에서 완벽한 익명의 '그'가 되어 있었어. 흡사 그림자처럼.
기분이 진짜 이상했어. 막 화가 나거나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내 추억을 도둑맞은 느낌?
내 외장하드에 꽁꽁 숨겨놨던 사진들을, 걔가 싹 긁어가서 자기 이름으로 전시회를 연 것 같은 기분이었지. 모든 기억의 저작권이 걔한테 넘어간 거야. 나는 그저 등장인물 1이었고. 완전 호구였네.
책을 살까, 말까. 한 1분은 서서 고민한 것 같아.
이걸 사서 밤새 읽으며 울어야 하나, 아니면 욕하면서 태워버려야 하나.
근데… 그냥 다시 꽂아 놨어.
이걸 사면 뭐 해. 우리 집 책장에 꽂아두고, 제목을 볼 때마다 생각만 날 거 아냐.
책 위에 먼지 쌓이는 거 보면서 '아, 내 20대는 저렇게 끝났지' 하고 한숨이나 쉴 테고.
그건 너무 처량하잖아. 이미 끝난 영화를 다시 돈 주고 보는 건 바보짓이지. 팝콘 값도 아까워.
그렇게 내 첫사랑은, 정가 15,000원짜리 에세이가 되어서 베스트셀러 매대에 얌전히 꽂혀 있었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서점을 나오는데, 해가 지고 있더라. 노을이 꼭 멍든 것처럼 시뻘겋게 번져 있었어.
시린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어. 그 풍경을 보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
사랑이라는 게 지나고 나면 다 이렇게 쓸쓸한 건가.
한때는 내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이,
이제는 가끔 서점에 들러야만 근황을 알 수 있는, 책 한 권 두께의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게.
웃긴데, 왜 이렇게 쓸쓸하냐.
진짜. 우리의 사라짐은 그저 기술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애초에 사라질 수밖에 없던 필연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