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었다.
내 방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졌다.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폰을 만지작거렸다.
내일 제출할 팀플 자료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았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래 나는 계획형 인간이었다. 아니, 계획하고 노력하면 뭐든 된다고 믿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늘 불안했다.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봐,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봐.
그 불안감이 나를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입시 때부터 그랬다.
죽어라 공부했다. 하루에 4시간만 자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책을 붙들었다.
목표는 오직 하나, 서울에 있는 명문대였다.
나는 내가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주변에서도 다들 그랬다.
"너처럼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
결과는? 처참했다.
재수. 삼수. 내 의지는 하늘을 찔렀지만, 세상은 내 편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지금 이 지방 대학에 와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그때의 좌절감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내 모든 삶의 방식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될 것은 되고, 안 될 것은 안 된다'는 이상한 체념이 자리 잡은 게.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는 식의 패배주의 같기도 했다. 그냥 편하게 살자 싶었다.
대충 학점 채우고, 대충 알바하고, 대충 친구들 만나서 떠들고.
그렇게 사는 게 나름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기대할 게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었다.
꽤 괜찮은 전략 아닌가?
그런데 지난주, 좀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교양 수업 팀플이었다.
조장을 맡은 나는 애초에 큰 기대를 안 했다.
다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인드 같았다.
발표 전날 밤, 나는 혼자 밤샘 작업을 했다.
어차피 내가 다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새벽 2시쯤이었나. 톡이 왔다.
"형,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제가 도울 거 있으면 말해요.
팀원 중 한 명이었다.
이름은 준혁이.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해서 별생각 없었는데, 얘가 웬일이지?
나는 대충 "괜찮아"라고 답했다.
근데 몇 분 뒤, 또 톡이 왔다.
"형, 혹시 잠시 만날 수 있어요? 제가 자료 좀 찾아봤는데, 형이 필요할까 봐요."
나는 황당했다. 이 시간에? 굳이? 근데 준혁이의 목소리는 너무 진지했다.
결국 나는 자취방을 나섰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편의점 앞에서 만난 준혁이는 한 손에 바나나우유와 두꺼운 전공 서적을 들고 있었다.
밤샘 공부라도 한 건지, 눈이 벌게져 있었다.
"형, 이거 보세요. 이 부분이랑 저 부분 합치면 좀 더 설득력 있을 것 같아요."
준혁이는 밤새워 찾아본 자료들을 보여주며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눈은 반짝였다.
나는 멍하니 준혁이를 쳐다봤다. 나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는 달랐다.
'될 일은 되게 하고, 안 될 일도 되게 하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 '띵'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노력하는 것의 가치. 포기하지 않는 것의 의미.
발표 날, 우리는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교수님은 우리 팀의 발표에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셨다.
"다른 팀보다 자료 분석이 깊이 있었고, 내용 전달도 깔끔했습니다." 칭찬이 쏟아졌다.
준혁이는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준혁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네 덕분이야." 준혁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니에요, 형. 형이 다 정리했잖아요." 우리는 서로에게 공을 돌리며 쑥스럽게 웃었다.
강의실을 나오면서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는 내 의지대로 안 되는 일이 분명 많다.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앞에 인간의 노력은 때로는 미미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동안 '될 것은 되고, 안 될 것은 안 된다'는 말을 핑계 삼아왔던 게 아닐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로, 편안하게 주저앉을 수 있는 변명으로 삼아온 건 아닐까.
어쩌면 노력은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때 오는 만족감, 후회 없는 과정. 그게 진짜 중요한 건 아닐까.
내 방 창문은 여전히 도시의 소음을 들이켰다.
쉬지 않고 윙윙거리는 오래된 냉장고 소리, 옆집의 희미한 대화 소리.
하지만 이제 그 소리들이 더 이상 나를 지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 해도, 그 과정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분명 있었다.
폰을 들었다. '준혁아, 주말에 시간 되면 밥이나 먹자.' 톡을 보냈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을 전했다는 거니까.
살면서 뭘 너무 애태워. 그렇지 않나? 너무 애태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놓아버려서도 안 된다.
그 미묘한 균형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성장하는 게 아닐까.
나는 더 이상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