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조금 성장

by 이로

햇살이 유난히 좋았던 오후였다.

창밖으로 손을 뻗으니 따뜻한 기운이 손끝에 닿았다.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며칠째 밤샘 작업의 여파였다.

"너 진짜 괜찮냐?"

옆자리 현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봤다.

피곤에 절은 내 얼굴이 그렇게 티 났을까.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뭐.”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론 ‘괜찮긴 개뿔’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밤낮으로 매달린 기획안이었다.

팀장님은 마감 직전까지 계속 딴지를 걸었다.

결국, 어제저녁 대대적인 수정 지시가 떨어졌다.


새벽 3시.

텅 빈 사무실에 나 혼자였다.

키보드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내가 붙들고 있는 이 기획안이 과연 좋은 걸까?

‘이게 맞나?’ 하는 회의감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다들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옆 팀 박 대리는 이미 지나간 아이디어라고 했다.

동기들은 꿈같은 소리라며 비웃었다. 그들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거 이미 다 해본 거야.”

“요즘 누가 그런 걸 해?”

“그냥 포기하고 다른 거 해라.”

이런 말들이 칼날처럼 날아와 박혔다.

내 열정이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의심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급기야 나 자신마저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화면 속 기획안은 그저 종이 뭉치처럼 보였다.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때, 문득 오래전 읽었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이 나를 의심할지라도,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문구였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문장이 내 심장을 관통했다.

그래, 남들이 뭐라든 내가 확신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내 안의 작은 불씨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 이 기획을 시작했을 때의 설렘과 열정을 떠올렸다.

밤을 새워 자료를 찾고,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던 그 시간들.

남들은 무모하다고 했지만, 내겐 희망이었다.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후회는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무거운 어깨를 펴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래, 누가 뭐래도 나는 이 길을 간다!’ 오기가 생겼다.

하나하나 뜯어고쳤다.

논리를 보완하고, 표현을 다듬었다.

새벽이 동틀 무렵, 마침내 기획안을 완성했다.

뿌듯함과 함께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다음 날 아침, 수정된 기획안을 제출했다. 팀장님은 꼼꼼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아 씨, 이번엔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특히 이 부분, 정말 탁월해요!” 칭찬이었다.

팀장님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다니, 믿기지 않았다.

어제 날 비웃던 동료들도 놀란 눈치였다.

그들의 시선이 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

점심시간, 현주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너 진짜 대박이다! 난 솔직히 안 될 줄 알았는데."

“그러게, 나도 내가 대견하다니까.”


퇴근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았다.

문득,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내 신념을 지키는 것.

비록 작은 기획안 하나였지만,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마주했고, 단단해졌다.

물론 앞으로도 수많은 의심과 좌절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지키고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중요한 건 다시 쌓을 수 있는 의지라는 것을.

어쩌면 인생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넘어지고, 깨지고, 또다시 일어서는 과정의 연속.


집에 도착해 불을 켰다.

텅 빈 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 안은 왠지 모르게 충만해진 기분이었다.

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 보였다.

피곤에 절어 있던 눈빛 대신,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이 그곳에 있었다.

왠지 모르게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 맛에 어른이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가장 큰 용기는 나 자신을 믿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용기가 나를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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