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들한테 할 말이 있어요."
수원에 사는 큰오빠, 인천에 사는 작은 오빠, 서울에 사는 나.
우린 중간 지점 인천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또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신경성위염.
어린 시절부터 달고 사는 구역질.
긴장되고 신경 쓰는 일이 있으면 나는 습관처럼 구역질을 한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튀어나올 것 같은 두근거림을 참으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말할 수 있어. 잘 될 거야.'
"희승이 회 좋아하지?"
회 좋아하는 동생을 위해 횟집으로 안내하는 오빠.
할 말이 있다는 말에 오빠들도 긴장한 듯 보인다.
"말해봐. 무슨 일 있어?"
맥주 한잔 따라놓고 계속 구역질하는 내가 큰오빠는 못 마땅한가 보다.
"음식 앞에서 왜 자꾸 구역질하니?"
맥주잔만 만지작거리며 구역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오빠가 짜증날만 하다.
"내가 긴장하면 원래 구역질을 해.
미안해. 더럽게 보여서.
너무 오래된 이야기를 하려니 긴장돼서 그런가 봐.
구역질이 멈춰지질 않네."
맥주 한잔을 입에 털고 나니 메슥거림이 나아지는 것 같다.
"나 여덟 살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아빠에게 성추행 당하고 있었어.
오빠들하고 엄마가 없을 때마다 그랬어.
평범한 가정으로 보이고 싶어서, 가족을 지키고 싶어서 죽는 날까지 숨기고 싶었어.
그런데 아빠 병원 모시고 다니면서 참았던 기억들이 다시 나를 힘들게 해.
아빠만 보면 숨이 막히고 힘들어.
친정에 자주 가지 않는 이유야.
엄마가 잘 못 될까 봐 끝까지 참으려 했어.
하지만 이젠 안 될 것 같아.
내가 죽을 것 같아.
엄마는 아빠에게 맞고 산 고통을 내게 풀고 있어.
오빠들은 몰라.
엄마는 오빠들과 내게 대하는 행동이 틀리니까.
엄마는 나를 감정쓰레기통으로 대하고 있어.
자신의 분노를 딸에게 퍼붓고 있지.
그 모습이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
그래서 오빠들에게 먼저 말하는 거야.
이젠 엄마에게 고백하려 해."
놀란 오빠들은 소주를 연이어 마신다.
"우린 개자식의 자식들이었구나..."
고개 숙인 큰오빠가 묻는다.
"왜 우린 몰랐을까... 성추행이면 어느 정도인지 물어봐도 되니?"
소주를 못 먹는 작은오빠는 계속 술잔을 비우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어릴 때는 무릎에 앉히고 우리 딸 예쁘다며 껴안으면서 치마 속으로 손을 넣곤 했지.
가장 많이 한 행동은 안마를 시키며 성기 근처까지 주무르게 시켰어.
엄마가 야간 근무 나가면 자고 있는 내 몸을 더듬거렸고.
점점 심해지기 시작한 건 큰오빠 군대 가고 작은오빠 지방 기숙사에 있을 때였어.
중2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빠와 둘이 있는 날이 많아졌지.
건넌방 벽에 내가 못질한 건 알아?
오빠들이 없는 빈 방에서 나는 숨을 참으며 제대로 잔 적이 별로 없었어.
아빠가 들어올까 봐.
문고리가 없는 그 방에 못질을 하고 빨랫줄로 묶어서 문을 잠그며 지냈어.
아무도 그 못에 대해 물어보지 않더라.
빨랫줄이 없어질까 봐 나는 빨랫줄을 동아줄이라 생각하고 가방에 넣고 다녔는데 말이야."
한숨을 길게 쉬며 작은오빠가 말한다.
"졸업하고 네가 가출한 날, 네 일기장을 봤었어.
사고 친 적 없는 네가 갑자기 가출해서 이상했지.
네 일기장에 자세한 얘기는 없었지만 죽고 싶다는 말,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만 쓰여 있더라.
혹시... 했지만 성폭행은 상상도 못 했다.
무심해서 미안하다..."
큰오빠는 나를 안고 엉엉 울고 있다.
"정말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힘들 줄 몰랐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도 너는 늘 웃고 있었구나.
늘 밝게 웃고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니 그게 더 마음 아프다.
오빠라고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구나.
폭행하는 아빠가 무서워서 나는 내 생각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정말 미안해..."
오열하는 큰오빠를 보며 괜히 말했나 후회스러우면서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가 생긴다.
"엄마한테 말할 거니?"
"아직은 용기가 없지만 조만간 말하려고 해.
친정에 가지 않는 나를 계속 원망하고 있으니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아빠의 뻔뻔함을 더 이상 보기가 힘들어.
너는 말하지 못할 거라고 굳게 믿는 교만함이 역겨워.
아빠는 착한 딸을 이용하며 평생 편하게 살아온 거야.
죄인이 죄인 아닌 것처럼 당당하게 효도를 요구하는 아빠를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어.
남편은 다 알아.
연애할 때부터 말했어."
"아..."
오빠들은 말없이 술을 따른다.
별 말 없어도 오빠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엄마를 걱정하는 마음, 자기 가족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더 이상 묻지 않는 오빠들이 그래도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다.
내가 부모를 떠나도 가여운 동생을 챙기며 내 곁을 지켜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오빠들은 네게 연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