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 도착한 시간은 7시 55분.
미리 나와 있을 부모님을 생각하며 서두르길 잘했다.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부모님이 보인다.
앞문을 닫으며 아빠에게 말한다.
"안전벨트 매시고 잠그는 것만 제가 할게요."
출근 시간 올림픽대로는 어김없이 꽉 막힌다.
한강을 바라보는 엄마는 병원 가는 외출이 여행길처럼 좋은가 보다.
"네가 운전하니 참 편하다.
아들 차 타는 것보다 편해.
차에서 담배 냄새도 안 나고.
방향제 냄새도 좋고."
말없이 운전하는 내게 아빠도 말을 건다.
"희승이가 운전을 잘해.
병원 가면 다 노인들 뿐인데 딸이 동행하니 얼마나 좋아.
노인은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간호사들도 불친절해.
네가 있으니 편하고 좋다."
딸의 동행이 좋은 부모님과 달리 내 기분은 계속 가라앉는다.
'아빠가 옆에 앉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엄마랑 바꿔 앉으라고 말해볼까?'
2002년 4월 13일. 아빠가 쓰러진 날.
날짜를 기억하고 있는 건 내 결혼식 전날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왜 결혼식 전날 쓰러진 걸까.
뇌경색 검사와 약 처방을 위해 아빠는 내 결혼식 전날부터 서울대 병원을 다니고 있다.
종이에 손만 비어도 큰일 나는 아빠.
자기애가 강한 아빠는 자기 몸을 세상 누구보다 관리하며 아낀다.
작은 상처가 나도 큰일 나고 가족이 감기라도 걸리면 자신을 위해 가족들은 마스크를 써야 한다.
자기애 덕분에 건강하던 아빠는 팔순이 지나고 후반에 들어서야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쩌렁쩌렁한 아빠 목소리가 언제쯤 약해지려나 기다리며 생각했다.
'아빠 가면을 언제쯤 벗길 수 있을까.
아빠가 죽기 전에 가능할까.
저 가면을 벗기면 무슨 일이 생길까.'
"내가 병원 다니는 건 다 너희를 위해서다.
가난밖에 물려준 게 없는 내가 건강하지 못하면 너희가 얼마나 힘들겠냐.
그래서 관리하는 거다."
자기애조차 자식을 위함이라 말하는 아빠.
평생을 자기 합리화로 사는 남편 말에 그러려니 하면 그만인 것을 엄마는 꼭 짚고 넘어간다.
"말은 바로 해야지.
자식을 위하기는 무슨.
자식 위하는 사람이 애들한테 병원비 따로 통장으로 보내라고 전화를 왜 해?"
"또 트집 잡기 시작하네.
조용히 해!"
며느리 앞에서도 엄마를 타박하는 아빠를 보며 속말을 참는다.
'그래. 끝까지 참자. 가면을 벗기면 우리 가족은 끝나는 거야.
나만 참으면 돼. 지금까지도 잘 참아왔으니 앞으로도 참을 수 있어.'
대기 의자에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다.
"이번 엄마 칠순 때 성형수술 해달라고 오빠한테 말했다."
엄마는 환갑잔치도 필요 없다며 그때도 쌍꺼풀 수술을 받으셨다.
"또? 이모, 외삼촌 모시고 식사하는 게 좋지 않아요?
엄마 여행 간 적도 없잖아. 여행 가서 놀다 오시지 왜요."
"난 여행 관심 없어.
작은 이모 살아계실 때 어떤 눈 삔 사람이 내가 언니 같다고 한 말이 지금도 잊히질 않아.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니?
고생한 인생도 억울해 죽겠는데 얼굴까지 늙어 보이면 너무 스트레스받아."
엄마 말도 맞다.
꽃다운 스무 살에 연애도 못해보고 14살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고생한 인생이 억울할 것이다.
돈 많은 남자라는 거 하나 믿고 꽃 같은 인생을 꿈꿨는데 홀랑 망한 것도 모자라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었으니 가엽고 불쌍한 인생 보상받고 싶겠지.
엄마가 보상받고 싶은 건 왜 외모뿐일까.
나는 엄마를 닮지 않았다. 외모에 관심도 없지만 꾸미는 건 더 귀찮다.
깔끔하게 하고 다니면 그만이지 왜 자꾸 무섭게 칼을 대려 하는지.
엄마는 내가 열여덟 살 때 이마에 좁쌀만 한 여드름이 난 것도 나보다 더 못 참았다.
하루는 시장 가자고 내 손을 끌고 마사지샵을 데리고 가서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너 그 여드름 없애려고.
약만 바르면 금방 좋아지니까 잠깐 눈 감고 있으면 돼."
마사지샵이 뭔지도 모르고 연고 발라주는가 보다 했다.
그럴 리가.
"조금 따가울 거예요. 금방 끝나요."
처음 보는 아줌마가 이마에 소독약을 바르더니 불에 달군 인두인지, 주사인지 알 수 없는 도구로 이마를 지지는 게 아닌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울면서 소리만 지르다 눈을 떠보니 내 이마는 화상 입은 것처럼 보라색으로 변해있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까만 딱쟁이가 떨어지며 이마는 새살이 돋고 여드름이 없어지긴 했다.
만약 불주사로 너의 이마를 지져서 여드름을 없앨 것이다라고 예고했다면 나는 절대로 야매 같은 마사지샵에 가지 않았을 거다.
한 번은 엄마를 모시고 건강검진을 갔다가 유방 초음파실 앞에서 엄마가 귓속말로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나 사실은 큰오빠 낳고 가슴 수술 했어.
초음파 하면 검사가 안 될걸?"
1969년도에 가슴 수술이 있었나? 그것도 놀랍지만 엄마가 뭐 하러 가슴 수술까지 해야 할 까 궁금했다.
"네 아빠가 모유 먹여서 늘어진 가슴보고 할머니 같다는 말에 충격받아서 한 거야.
아무도 몰라.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거야."
이상했지만 엄마에겐 외모가 중요한가 보다 생각했다.
외모가 중요해서 10년마다 성형 수술을 받고 싶은가 보다 했다.
"코로나 걸릴까 봐 대중교통 타기도 무섭고.
성형수술한 얼굴로 걸어 다닐 수도 없고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큰애가 강남 병원 예약해 준다고 했는데 네가 엄마 데리고 다녀주면 안 될까?"
아빠 병원도 모자라 엄마까지.
코로나가 무서우면서 병원은 왜 자꾸 가자는 건지.
"이참에 딸 얼굴 자주 보고, 데이트하는 것 같고 좋아서 그래.
엄마가 외출하는 거 봤어?
집에만 있으니 감옥 같고 심심한데 네가 와주면 드라이브도 할 수 있고 좋잖아."
딸이 보고 싶다는데, 드라이브해서 좋다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알겠어요."
알겠다는 말에 엄마는 다시 환해진다.
"점심 먹고 가자."
"석이 올 시간 다 되어가는데 집에 가서 드세요."
"밥도 안 했어.
넌 뭐가 그리 매일 바쁘냐? 밥 먹을 시간도 없니?
전에 갔던 그 회냉면 맛있더라. 거기 가자."
그래. 어차피 친정 가는 길이니까 회냉면 좋아하시니 먹고 가자 생각했다.
집에 온 석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오늘도 외할아버지 병원 갔어?
나 배고픈데..."
"석아, 돈 있지? 우선 편의점 가서 도시락 사다 먹고 있어.
레인지에 돌릴 줄 알지?
축구장 가기 전에 엄마 도착할 수 있어.
가방이랑 물 챙겨놓고 엄마가 전화하면 바로 내려와."
맛있게 드시는 부모님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