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상황은 종료됐는데, 수치심은 여전하다.
갑자기 불현듯... 이전 면접 때의 상황이 지나치게 생생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 모든 것을 부정당했다는 생각에 괴로워 몸부림친다.
세간에선 이것을 이불킥이라고 한다.
정정하자면, 부정당했다는 느낌보다는 생각 없이 내뱉은 내 이상한 말들이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콕콕 찌르는 느낌이다. 준비를 해가도 면접에만 가면 긴장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거나, 또는 그런 헛소리들을 수습하느라, 더 깊은 나락으로 빠졌던 경험이 꽤 있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내 대답은 꽤나 우스웠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기분이 그리 좋진 않다. 난 하찮은 사람이었나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비웃음을 당할 사람이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구직자이고 그 사람이 고용주인 상황에서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길이 아니다. 그 회사는 내 회사가 아니었던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곱씹을수록 허접한 내 답변을, 그 답변에 대한 면접관의 무례한 태도를 떠올리면 면접 보는 상황이 아닌데도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한다. 세상이 너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나갈 수 없는 천성을 타고난 거다,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 아니면 포기하라며 나를 거칠게 나무라는 것 같았다.
너는 열심히 한 게 아니다. 너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그러니까 너의 노력을 높여라.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면 견뎌지는 게 세상이다. 너의 부모가, 우리의 조상이 이제껏 그리 살아왔다.라고 말한다.
모르겠다. 고통의 동반이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에는 일부 동의를 하지만, 그게 이렇게까지인 게 맞는 건가. 진짜 나만 이렇게 힘든가. 사실 난 힘든 게 아닌데 그저 내 상황에 지쳐 쉬고 싶고 게을러지고 싶은 것을 열심히 했다는 핑계로 둘러대는 게 아닐까. 내가 이렇게 힘든 게 사실은 힘든 게 아닌가. 의심을 한다.
어떻게 해서 나는 평온함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가, 나는 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실패를 거듭하는가
이 질문을 아침마다 반복한다.
결국 내 평온함은 욕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내 상황의 긍정적인 부분들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쉽진 않다. 티비 예능에 나오는 떡 벌어지는 자산이 있는 사람들, 예쁘고 잘생긴 멋있는 사람들을 보면 상대적 박탈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 예능들이 잔뜩 나오는 세상이니, 현대인들은 일, 가족, 성공, 사람 등에 대해 모두 가져야만 한다는 최면에 걸린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부족해도. 그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만족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누가 페라리를 타고, 구매한 주택의 매매가가 몇 배로 뛰었고 이런 것들은 제쳐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식사 한 끼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삶에 감사하기로 했다.
물론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나는 아직 하수다.
내 마음을 흔들리지 않도록 다스리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것 같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야겠다. 죽어서 돈은 못 가져가도 긍정적인 영향력은 남아 세상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 테니, 좀 더 선한 삶, 베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