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퇴사 안 했습니다
나는 어느 조직을 가도 그리 길게 다니지 못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성격이 급하고, 쉽게 질려하고, 쉬운 일만 하고 싶고, 일에 대한 욕심이 없고, 야망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단, 퇴사의 꿈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회사에 갈리고 있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퇴사와 경제적 자유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류승수가 라디오 스타에 나와 말했던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 공감표를 얻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결국, "다들 이렇게 산다. 인생 별거 없다. 그냥 사는 대로 살자. 남들도 나와 같다. 나보다 특별히 잘 사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일주일을 버틴다. 한 마디로, 여길 나가서 다른 곳을 가봐야 때깔만 다른 똥밭일 것이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유독 회사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업무 분장을 제대로 의논해 결정한 날이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나의 일이 넘치는 사태가 발생했고, 조정을 시도했지만 딱히 바뀐 것은 없었다. 죄다 3년 차 이하의 팀원으로 구성된 우리 팀의 중간관리자 부재를 채우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중간관리자가 있고, 착착 일을 배울 수 있고,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내 연차에서 충분히 맡아도 될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들어와 버린 이곳은 답이 없고, 그나마 모두가 같은 처지여서, 서로를 측은하게 여기며 생긴 동료애가 이곳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팀장님은 나를 데이터 쪽 커리어로 밀어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데이터 분석이나 관리에 능한 사람인가? 적성에 맞는가? 즐거운가?를 생각하면 확실하게 YES!라는 대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루틴하고 반복되는 변하지 않는 업무들에 즐거움을 느끼고, 템플릿을 만들어 서식을 맞추고 자료를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어디 하나 틀렸을까 노심초사하며 면밀하게 자료를 탐색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데이터와 관련된 역량은 추후 이직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타이틀이 내가 원하던 내 모습과 완벽하게 fit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꽤 많이 해야 하는 영역이기도 하고, 데이터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을지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독 오늘은 앞으로의 커리어와, 회사 탈출과, 돈벌이 등등의 걱정이 연쇄적으로 밀려오면서 문득 퇴사가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모두가 이런 날이 있을 것이다. 나도 무수한 그 날들 중 하루를 마주한 것일테지. 여전히 마음은 퇴사하고 싶지만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다.
뜬금 없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찾게 되는 철학자가 있다. 바로 쇼펜하우어다. 삶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있어서 쇼펜하우어의 말이 참 타당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 그 자체다. 욕구와 욕망이라는 역학이 인간을 구조적으로 쉼 없이 분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갈구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삶 자체가 고통의 굴레와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 잠깐 상대적으로 부재한 상태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곱씹으며, 그래 삶이란 원래부터가 고통이지? 그런 것 치곤 나쁘지 않은 삶이야. 라며 또 정신승리로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