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에 대한 생각
지난주에 직장 동료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다녀왔다. 더 슬픔이 느껴지는 건 그분의 발병 소식부터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과정까지 소식을 들어왔기 때문인 듯하다. 1년이 채 안 되었다. 발병 소식을 들은 것이 말이다. 허리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갔더니 전립선 암이 척추에까지 퍼져 있는 걸 확인했고, 입원을 한 후에는 일어나기를 힘들어하셔서 결국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했다. 요양 병원에 계시면서 늘 집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달래고 달래서 지금까지 왔다고 했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거다.
일련의 과정을 들으면서 너무 급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죽음의 과정은 다르겠지만, 이건 너무 빠르지 않나 싶었다.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은 훨씬 더 그렇겠지만, 이건 질병이니까 경우가 다르지 않나. 지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갑자기 통증이 심해져서 몇 주 만에 돌아가시는 분도 있다고 그런다. 허걱.
아픈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가족은 힘들다. 그 기간이 짧아지는 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별의 시간이 너무 짧은 건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될 것 같다. 아픈 환자 뒤치다꺼리하느라 징글징글해질 만할 때에 이별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또 누군가는 죽음에는 나이가 상관이 없다고 얘기한다. 요만한 초등학생 1학년이 교통사고로 죽는 일도 뉴스에 나오니깐.
<명상록>의 저자는 죽음을 우주의 먼지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였고, 사는 날 동안에 겸허하게 살았다. 나도 그러고 싶다. 나는 육신이 우주의 먼지가 되는 것은 받아들이겠지만, 영혼은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곳 어딘가에 가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남은 날이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100세 시대에 100세만큼 못 살 것도 받아들이는 중이다. 누가 100세 시대라고 말하면 나는 속으로 그런다. 나는 그 정도 못 사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 좀 우울하지만, 그것도 받아들이려고 한다. 우울해지는 내 마음도 받아들이고, 서글퍼지는 내 마음도 받아들이고. 욕심껏 살아보려고 했던 요 몇 년의 내 모습도 봐주고, 욕심을 내려놓고 살려는 현재의 내 모습도 봐주자.
그러다가 화가 나기도 하고,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더라도 그것도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슬픔이든 우울이든 분노든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죽음을 생각하면 살아있음이 두근거린다. 펄떡펄떡 뛰지는 않아도, 잔잔해도 살아있으니까. 남들처럼 특별하거나 위대하지 않아도 그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으니까.
장례식에는 한 번씩 가 봐야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