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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향기 Nov 23. 2023

다름은 틀린 게 아닌데

불편하다

 감사하면 감사의 제목이 따라온다. 감사하면 복을 받고, 일이 잘 풀린다. 웃으면 복이 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불평 불만은 영 쓰임이 없는 것일까. 불평하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관찰을 잘 한다. 문제점을 잘 파악한다. 나는 안 보이는데, 어디서 문제를 찾아내고 불평을 시작한다. 불평으로만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그 불평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닐까. 매사에 감사하기만 하는 사람에게 문제 거리는 잘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도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평도 불만도 쓰임이 있다. 못되게 남을 괴롭히는 사람, 복수하는 사람도 어떻게 보면 그 방면에 능력자다. 다른 사람이 어떨 때 가장 아파하고 고통을 느끼는지 안다. 어느 지점을 노려야 치명타를 날리는 지도 안다. 어떻게 말을 비틀어야 더 상처를 줄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건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본능이다. 타고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타고난 본성을 가진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 본성과 능력은 인정하되,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다. 폭력이 될 수 있으니까. 


 폭력은 당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해자는 장난이어도, 피해자가 장난이 아니고 폭력이었다고 하면 그건 폭력이 된다. 가해자의 말을 듣고 피해자의 말을 들으면 영 사건은 달라진다. 그리고 폭력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그러면 가해자에게는 어떠한 악한 의도가 없었나. 그건 알 수가 없다. 있었다 해도 없다고 하면 증명할 길이 없다. 어떤 계획의 과정이 증명될 수 있다면, 의도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으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주고받는 말들에는 무슨 계획함을 증명할 수 있겠나. 


 미묘한 눈빛과 소소한 스킨십으로도 상처는 받는다. 나를 따돌리는 듯한 그들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는다. 그것이 아무리 미미하고 스쳐 지나가듯 순간적인 것이라 해도, 생채기는 난다. 


 나는 어른이고, 이 아이들은 학생이고. 나는 그래서 더 훌륭한 판단을 해야 하고, 선택을 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우선 훌륭한 판단부터 자신이 없다. 나는 피해자만의 편이 되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아니다. 물론 맹목적으로 자기 아이만을 감싸고 도는 엄마의 행동은 바람직하다 하기 어렵겠지만, 심정적으로는 아이 편이 되어 주는 것이 엄마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양쪽을 모두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다. 


 상처입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고, 함께 방법을 생각한다.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와도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고, 방법을 생각해 본다. 


 주로 상처받는 아이들은 개성이 있는 아이들이다. 개성이 있는 게 무슨 잘못이겠나. 잘못이 없다. 그런데 피해를 입는다. 상처를 받는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고 말이다. 학교라는 사회에서는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칠판을 보며, 같은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다. 종이 치면 수업이 시작되고 또 종이 치면 수입이 끝난다. 모두 같은 숙제를 해야 하고, 수행평가를 준비한다. 모두 같은 시험지를 받고, 답안지를 작성해야 한다. 


 똑같은 것을 하라고 계속해서 강요를 받는 곳에서 남다름은 더욱 튄다. 나와 다른 모습을 보면 이질감이 느껴지고, 불편하다. 이해가 안 된다. 어느 정도 허용 범위가 있는데, 그것을 넘어서게 다른 아이들을 보면, 불편하다.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닌가. 나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그 아이로 인해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나만의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을 벗어난 그 아이의 모습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그 아이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아이를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 반에 그 아이가 있는 것은 내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불만이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매일마다 마주쳐야 하는데, 매일매일 불편함이 쌓이니까 어느 순간 화가 났고, 복수를 하고 싶다. 나도 그 아이를 괴롭히고 싶은 거다.  나만 괴로운 것이 억울하다. 


 학교는 그리고 사회는 어느정도의 강요와 강제가 있다. 어디에나 있다. 가정에서도 부모가 선택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강제와 강요이다. 함께 지내야 하는 곳, 공동체에는 어디에나 규칙과 규율이 있다. 그래야 질서가 유지되고, 효율적으로 일이 진행이 되니까 그렇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규칙과 규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인 기준이 있다. 고정관념도 있다. 편견도 있다. 어그러진 마음도 있다. 그렇게 뒤섞여서 나의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규정하고 밀어낸다. 괴롭힘을 가한다. 나도 괴롭다고 하면서. 


 몇해전 괴롭힘을 당했던 둘째 아이는 당시 가해자로 분류되었던 아이들과 요즘에도 학교에서 마주친다고 한다. 당시에는 사과하며 반성을 했었지만, 지금은 그 때 자신들은 억지로 사과했었다고 말한다고 한다. 문제는 그 아이들은 여러 명이었고, 우리 둘째는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비율이 비슷했더라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소수는 약자가 된다. 


 영화 파리대왕을 보며 끔찍한 기분을 느꼈던 때가 떠오른다. 영화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도 끔찍한 일은 벌어진다. 누군가에겐 별일 아니게 지나갈 일도 섬세한 아이들에게는 아주 큰 일이 된다. 다 느끼니까. 다 아니까. 


 조금 덜 똑똑하면 모를 수도 있는 것을 똑똑해서 알고, 조금 무뎠다면 모르고 지났을 감정도 섬세한 아이는 다 느낀다. 그것도 타고난 본성이다. 바꿀래야 바꿀 수가 없다. 


 나라는 사람도, 나에게 주어진 이 환경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환경은 바꿀 수가 있을까. 어느정도는. 그러나 바꾸지 못할 상황과 이유가 얼마나 많은가. 바꿀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해 주어야 할까.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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