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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향기 Feb 15. 2024

명상록으로부터

말장난까지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삶과 죽음, 전우주적 영역에 걸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해 놓았다. 인간은 물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째서 그 옛날의 사람에게 더 놀라운 지혜가 있는 것인지 참 신기하다.


 내 책상에 꽂혀 있는 저 녹색 표지의 책으로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마르쿠스라는 사람을 만난다. 그는 왕이었고, 지혜로웠으며, 가족을 사랑하는, 철학자이자 군자였다. 그에게는 지금과 같은 다양한 책들이 없었지만 위대한 생각을 했다. 스승과 대화하거나 동기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져갔다. 궁금한 게 있으면 생각을 했다. 생각을 하다가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또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그래서인지 명상록은 곱씹어 읽게 되는 책이다. 어떤 문구에 이르면 가슴이 웅장해지고 내가 거대한 우주 한 가운데 홀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멈출 수 밖에 없다. 그 웅장함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왓칭이라는 책에서 강조하는 관찰자 효과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어 자신의 바로 머리 위에서 쳐다보다가 점점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고, 저 우주 높은데까지 올라가면서 나를 관찰하라고 한다. 나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뇌에서만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관점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상식으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변화이다. 


 그렇다. 나는 우주 전체에서 바라다본다면 아주 작은 점 하나일 것이다. 잘 보이지도 않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점이다. 그런데 책상 앞 내 거울에는 커다란 내 얼굴이 보인다. 결코 작지 않고, 너무나 잘 보이는 얼굴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보이지 않는 사물이다. 누군가한테는.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나란 존재는 그렇게 존재한다. 어떤 때는 잘 보이지만, 어떤 때는 안 보이는 그런 존재이다. 지금 내 오른손에 만져지는 나의 왼손은 사실 많은 세포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작게, 더 작게 들여다보면 그 세포 조직의 미세한 부분들은 있다가 없다가 하는 초미세 입자(?)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그 작은 초미세 입자들의 파동에 의해 나의 실체가 결정되는 것이다. 실체가 있는 듯하나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이게 다 무슨 황당한 이야긴가 싶지만, 내가 흥미롭게 읽은 책들에 적혀 있던 내용들이다. 책이라고 해서, 티비에 나온 누가 말했다고 해서 모든 정보가 다 사실인 건 결코 아니지만, 아무래도 난 이런 이야기들에 더 끌리는 것 같다. 


 희곡 작품인 파수꾼을 수업하면서 첫 시간에 내 생일이 몇월 며칠인지 가르쳐주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날과 똑같다고 말해주었었다. 그리고 파수꾼 수업 마지막 시간에 누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날짜가 언제인지 찾아본 사람이 있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없었다. 물론 학생들은 관심도 없었겠지만, 내 의도는 분명했다. 교사라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어쩔 것인가. 당연히 선생님이 잘못된 정보를 전해주진 않았겠지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누구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파수꾼에 나오는 지도자처럼. 그 정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말로 찾아보는 일은 귀찮고 힘들다. 그래서 그냥 들려주는 대로 정보를 믿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거짓 정보가 전국을 돌고 기정사실화되고 난 한참 뒤에서야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정보들이 책과 인터넷에 가득하다. 누구는 그걸 다시 조합해서 점점 더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어지럽혀진다.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 정확하게 이것은 진실이고 저것은 거짓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단어 하나에 따라서, 그 단어의 배열 순서에 따라서 문장의 의미는 어떻게도 달라질 수 있고,  그것을 풀어 설명하는 사람의 말재주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변용될 수 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어쩌면 한번도 정확한 적이 없었던 정보나 사실을 철썩같이 믿고 살아왔는데, 그런 나 자신도 사실은 실체가 불분명하다니, 세상은 온통 불명확한 것 투성이다. 혼란 그 자체.


 나는 그런 말장난을 파헤치고 가르쳐야 하는 교사인데, 그래서 가끔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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