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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네 Dec 27. 2023

 완벽주의, 이제 그만 헤어져요.

  어렸을 때 누군가 어떠한 삶을 꿈꾸냐고 물으면 '유유히 흐르는 강물 같은 삶'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다소 영감님 같이 들리는, 젊은이의 원대한 포부나 기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꿈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 큰 일 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삶'의 시각화 버전이었다. 세상이란 두려운 것 천지였고, '별 탈 없는 현재'를 손에 움켜쥐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았던 내게 변화라는 것은 그저 '애써 쌓아 올린 평화로운 지금'을 깨뜨리려 불쑥 찾아온 침입자 같았다.

  스스로를 '겁이 많고 용기가 부족한 사람'으로 알아 왔던 나는 온갖 두려운 것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나름의 방편을 찾았는데, 이때 택한 것이 아마도 '완벽주의'였던 것 같다. 어떤 일이 갑자기 발생하여 나의 소중한 고요와 평안을 허물어뜨릴까 봐 언제나 모든 상황과 변수를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마음의 안식을 찾고자 노력했다. 열심히 준비했고, 늘 고민했으므로 어떤 일이든 대체로 성과가 좋았다. 내가 택한 방식으로 작은 성취들을 이루어갔으므로 나의 행동 양식은 더욱 공고해져 갔다. 끊임없이 상상하고, 대응하고, 안심했다. 문제는 무슨 수를 써도 '모든 것'에 대비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는데, 예외가 발생하는 것은 곧 나의 빈틈이 드러나는 것이었고 이때 보이는 크고 작은 흠결에 그만 쉽게 좌절했다. 참으로 안쓰럽게도 그때의 나는 100점이 아니면 0점인, 매우 고단한 삶을 살았다.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택한 '완벽주의'는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어 극심한 무력감과 우울감이 찾아왔으며 이후 오랫동안 아팠다. 

  스스로를 들들 볶는 치열한 내적 전쟁의 시기를 지나 내 안의 작은 나와 조금씩 화해하기 시작하면서 다행히 조금씩 뻔뻔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남들에게 유능하고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긴 하지만 아차하고 허술한 구석이 드러났을 때 "아유 제가 놓쳤나 봐요!" 하는 자신이 전처럼 형편없이 못나 보이진 않는다. '이 정도면 best는 아니어도 선방한 거 아니야?' 하며 스스로에게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주자, 놀랍게도 다른 사람들의 이런저런 빈틈들도 덜 신경 쓰게 되었다. 이 사람의 사정도, 저 사람의 상황도 '그럴 수 있겠지' 카테고리에 담다 보니 세상만사 화낼 일이 많이 줄었다. 참으로 감사한 변화이자 발전이다. 

  '변화라는 것,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닌가 봐.' 하고 이제야 조금씩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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