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좋아한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가 이대로 헤어지기 싫어서 바로 한 권 데려왔다. 야트막한 책장 위 눈길이 잘 닿는 곳에 두고는 자주 눈을 맞춘다. 인간이 인간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평온한 사랑과 응원이 퐁퐁 솟아나는 그 책이 내 공간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추운 겨울날 폭신한 이불에 감싸인 듯 포근하고 나른해진다.
4년가량 약물과 상담의 도움을 받았지만 불안과 우울은 아마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을 나와 함께 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매우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애쓰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뿐. 낯설고 강렬한 어지러움이 자꾸만 찾아와 얼이 빠진 채로 찾아간 병원에서 처음 우울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전혀 우울하지 않은데요?"라고 항변하며 치료를 거부했었다. '그렇지 않게' 살아본 기억이 없던 나는 내가 잔뜩 고장 나 있다는 진단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냥 요즘 자꾸 내가 내 맘대로 되지 않았을 뿐인데.
밤새 간절히 청하다 얼핏 든 잠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며 새벽을 맞이하는 일, 마구 죄어오는 심장의 통증을 진정시키려 바닥에 웅크려 보는 일, 소리를 꺼 놓은 전화가 부르르 울릴 때 이는 미칠 듯 한 두려움, 세상과 분리된 채 투명한 막 안에 홀로 떠 있는 것 같은 몽롱함. 맞다. 나는 심각한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닳아버린-혹은 처음부터 잘못 달았을 부품을 갈지도 않고, 자꾸만 삐죽 대며 튀어나오는 조각들은 꾸역꾸역 밀어 넣은 채 위태롭게 달리던 열차는 어느 날 요란한 소음과 함께 엎어져버렸다. 길바닥에 누워서는 잔뜩 자존심이 상했다. 어떤 역경에도 노련한 운행을 선보이며 우아하게 도착하는 특급 열차이고 싶었는데, 덜컥 망가져 노지에 승객들을 쏟아내고는 차고지로 실려가는 고물 열차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잘' 살아내고 싶었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몰라 애가 탔다. 자꾸 주저앉는 나를 안아 일으키려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나를 홀로 마주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집요한 공격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내가 잘 돌봐주지 못한 사이 내 안의 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상처를 지독히도 많이 쌓아두고 있었다. '인간'과 '삶'에 대한 책이나 강연이 있다면 장르를 불문하고 기를 쓰며 파고들었고 정신과 상담과 약물 치료를 꾸준히 받았음에도 나의 상태는 롤러코스터처럼 등락을 반복했다. 약과 상담이 더 필요치 않겠다는 의사 선생님의 치료 종결 선언과 함께 드디어 '이 놈'을 떼어냈다는 기쁨과 자부심에 차 지내다가 다시 통제 불능의 우울과 불안에 잔뜩 쪼그라든 채 실패자가 된 심정으로 병원을 찾았다. 좀처럼 나를 떠나지 않는 불안과 우울이 지겨웠고, 두려웠다. 정말이지 오랫동안 맹렬하고 지난한 전쟁을 이어가던 나와 나는, 어느 날부터 조금씩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힘들었냐?'
'그동안 매번 잘 해내라고 해서 미안해...'
'이거 하기 싫어? 그럼 안 해도 돼. 못해도 돼.'
'오, 이거 재밌겠어? 그럼 해 봐.'
'하다가 아닌 것 같으면 그만둬도 돼. 하다가 망쳐도 돼.'
'정말이야. 다 괜찮아.'
너무나도 듣고 싶던 그 말을, 드디어 내가 나에게 해 줄 수 있게 되자 나는 정말로 조금씩 괜찮아졌다. 한껏 옹송그리고 잔뜩 겁먹었던 내 안의 작은 아이는 그제야 자라나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제법 어른처럼 굴기도 했다. 그간 참 고생했다고, 잘 살려 애쓰지 말고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다 괜찮다고. 나를 꼬옥 안으며 이야기해 준다. 짜식... 많이 컸다. 정말이지 기특하고 고맙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