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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네 Sep 11. 2024

너의 세계

Respect!

    나의 아이는 요즘 지극히 몰두하는 대상이 있다. 학교 다녀오자마자 가방을 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는 달려가 앉는 곳, 바로 자신이 키우는 작은 생명들의 3층 아파트 앞이다. 그중 달팽이가 가장 먼저 입주해서 꼭대기 펜트하우스를 차지했고, 중간층에는 사슴벌레 한 마리가 씩씩하게 살고 있으며, 가장 마지막으로 1층에 장수풍뎅이 쌍이 이사와 수많은 자손들을 남기고 있다.


    늘 동물을 좋아던 아이는 어려서부터 기르고 싶다는 것이 참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닭, 햄스터, 토끼, 고슴도치, 거북이, 개미, 거미(으악?), 뱀(꾸엑!) 등등이 있고 언제나 "우리 집엔 감자가 있잖아~ 있는 강아지나 잘 키우자."라는 말로 거절을 당했었다. 존재감 뿜뿜 하는 동물은 안될 것임을 직감한 아이는 작은 케이지 안에서 키울 수 있는 곤충류(사슴벌레, 장수풍뎅이)와 달팽이로 노선을 바꾸었는데 이 역시 엄마는 칼 같이 잘라버렸다. 퍽 끈질기고 간절했던 청을 계속해서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혹시 순간의 호기심으로 생명을 데려와서는 얼마못가 흥미를 잃고 방치할까 염려해서였다. 또한 아이가 책임감을 갖고 그 '살아있는 것'을 바르게  돌볼 수 있도록 보호자인 내가 꾸준히 지켜보고 교육을 해야 할 텐데 그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아주 큰 아들 하나, 아직은 작은 딸 하나, 강아지 하나, 나 이렇게 넷 건사하기도 이미 힘들었다). 마지막 이유는... 꿈틀거리는 종류의 생명체들은 아무리 봐도 징그러우니까! 난 강아지만 좋다, 쿨쩍.

    

    올봄, 아이가 엄마 아빠를 닮아 도통 밖에 나가질 않고 집안에서 굴러다니는 걸 너무 좋아하는 점이 걱정된 나는 '주말마다 공원에서 한 시간씩 자전거 타기' 10회 미션을 제안했다.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탈 경우 5주, 하루만 타게 되면 10주가 걸리는 이 미션을 달성하면 꼭 갖고 싶었던 것을 선물해 주겠다는 무척이나 과감한 공약을 내걸었는데, 이때 아이가 원한 것이 바로 달팽이였다. 어허, 올 것이 왔도다. 기어이 꾸물꾸물 달팽이를 들여야 하는구나. 고민 끝에, 네가 키울 생명에 대해 미리 공부할 것, 초기 비용을 제외한 이후의 양육 비용은 너의 용돈으로 해결할 것, 끝까지 너의 힘으로 돌볼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고 아이는 이 모두에 흔쾌히 동의했다. 자전거 타는 것을 워낙 싫어하는 아이라 중간에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았으나 아이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약속한 횟수를 모두 채웠다. 이제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렇게 '아프리카 왕달팽이'는 우리 집의 다섯 번째 생명체가 되었다.


    2층 입주자, 사슴벌레는 그 출신이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다. 아이의 고모네서 묵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너무 배가 불러 이대로 누울 수가 없다며 새벽 산책을 나갔던 남편이 돌아와서는 나지막하면서도 다급하게 날 불렀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양손을 모아 사슴벌레 한 마리를 감싸 쥐고서. 말 그대로 '오다가 주웠'단다. 아이가 너무나도 좋아할 것 같아 일단 데리고 왔는데 혹시 내가 안된다고 하면 아이한테 들키기 전에 조용히 내보내겠다면서. 아니! 인적 드문 깊은 숲 속, 참나무 근처에서 살아야 할 사슴벌레가 제 발로 아파트 단지로 내려왔다고? 그것도 그날 딱 하루 묵고 가는 먼 동네 아저씨가 부른 배를 안고 지나가던 길 위에 얌전히 앉아있었다고? 잔뜩 설레는 얼굴을 한 아주 큰 아들과 마침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슴벌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런 게 바로 운명인가 싶었다. 왠지 사연 많고 기운 없어 보이는 이 생명을 기꺼이 돌볼 사람 하나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슴이'가 우리 집으로 왔다. 급하게 마련한 꿀단지 안에 담겨, 또한 급하게 구해온 곤충 젤리를 먹으며, 기차 타고.


    장수풍뎅이 부부는 위식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아이에 대한 신뢰의 산물이었다. 아이가 급작스러운 수술무사히 마치고 퇴원할 무렵, 혹시 갖고 싶었지만 포기했던 것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엄마가 응원하고 축하하는 마음으로 허락할지도 모르겠다고 운을 띄웠다. 아이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뜨겁게 고민한 끝에 장수풍뎅이 쌍이면 좋겠다 했다. 그간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식들' 앞에 앉아 상태를 살피고, 각종 먹이와 흙 교체하는 주기 등 중요한 할 일들을 달력에 써 놓고 챙기며, 꾸준히 배설물을 치워주고 흐트러진 주변을 청소하는 아이 모습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한 쌍'의 생명이 우리 집에 왔고, 이 사이좋은 부부는 꽤나 많은 자손을 보았다. 아이는 많고 많은 알들을 조심스레 분리해 두더니 그중에서 애벌레 다섯 마리를 얻었다. 이제 어엿한 '할머니'가 된 아이는 꾸물럭거리는 그 '손주들'을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아이는 틈만 나면 이들이 모여 사는 '3층 아파트' 앞에 앉는다. 관찰하고, 돌보고, 공부하느라 무척이나 분주해 보이지만 처음 약속한 대로 엄마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 식구들'을 살뜰히 건사하고 있다. 가족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에는 부지런히 일어나 졸린 눈을 부릅뜬 채 각 층 식구들을 샅샅이 살피고 분가한 애벌레들까지 여러 날 지낼 수 있도록 이런저런 채비를 해주기에 속으로 놀랐다. 나에겐 이렇게나 징그러운 것을 너는 그렇게나 진지하게 사랑하고 있다니! 아이가 하도 그들을 애지중지하고 귀하게 대하니 나도 이제 그 앞에서 싫은 티를 내기가 어쩐지 미안해졌다. 늘 멀찍이서 흘긋거리기만 하다 어느 날은 용기를 내어 아이 곁에 슬며시 다가앉아 본다. 첫째 애벌레가 지난주보다 2g 더 자랐다고 무척이나 신나 하는 아이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그 아이가 몰두하는 작은 생명들에게도 눈길을 돌려 본다. 자꾸 보니 좀 정드는 것 같기도...? 네가 그토록 귀여워하는 그들을, 나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려고 애써 봐야겠지. 역시 너와 나는 다른 사람, 우린 각자의 우주를 만들며 살아가는구나.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공고하고 찬란한 너의 세계, 적잖이 re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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