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옥수수를 삶았다. 아빠와 옥수수는 서로가 처음 삶아지는 상황이라 어색하게 뜨거워졌다. 앞니 빠진 어린 아이처럼 옥수수가 씹혀졌다.
"아빤 몇 살이 되고싶어?"
나이 역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하는 아들과의 대화에 10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가 떠올랐다. 아직 30대에 머물러 있을 친구는 내 아내와도 아는 사이였다.
"걔 좀 이상하던데"
친구는 아내의 성격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짧게 사귀었을 적엔 잘 몰랐는데 결혼하고나니 친구의 경고가 이해됐다. 결혼 전에도 드러나지 않던 아내의 단점을 친구는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내는 결핍에 의한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을까? 어쩌면 기름을 많이 먹는 포크레인처럼 넣어도 넣어도 채워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사람을 들여다보는 안목이 부족한 사람이다. 카메라 뷰파인더처럼 조그만 창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명확한 초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시간의 공을 들여 침착하게 바라봐야 대상의 상이 떠오른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대상은 명징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을때에야 비로소 육식 동물의 습성이 나타난다. 생채기가 생기고 나서야 옥수수의 속살이 드러난다. 앞니 빠진 아이의 미소로도 속마음은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
'아빤 지금 나이로 너와 이 시간에 머물고싶어.'
속마음을 전달하진 않았다. 머물 수 있는 나이는 그대가 사라질 순간의 나이일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