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물과 같이 흘러서 어느새 설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어요. 그해 여름 와룡리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쩔쩔매는 일이 일어났어요.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도 다 마르고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마을에서 공동으로 쓰는 우물도 다 말라 버렸어요.
그런데 다행인 것은 설이네 집 마당에 있는 우물은 마르지 않았어요. 우물이 깊고 겨우 두레박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작아서 손바닥 만하게 하늘이 비쳐 보일 정도의 우물이었는데 말이에요. 와룡리 사람들은 윗마을이나 아랫마을이나 가릴 것 없이 설이네 마당에 있는 우물에 와서 마실 물을 길어갔어요.
“하 고것 참 이상도 허다잉? 고 쬐끄만 것이 어디에다 물 근원을 대고 있는 것이여? 아매도 어디 깊은 지하수 같은 디 물줄기가 콱 연결되야 있는 갑다.”
“그러게 말이여. 설이네 우물이 아녔으면 저 와룡산을 넘어가야만 물을 길어올 수 있는디, 천만다행이제.”
동네 사람들은 고마워서 한 마디, 신기해서 한 마디씩 했어요. 설이네 우물에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이 날마다 사람들로 북적북적, 시끌시끌했어요.
그렇게 사람들이 설이네 우물로 모여들게 되자 당연히 설이네 가족에게로, 설이에게로 마을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어요.
“설이 태어날 때는 그렇게 마땅찮게 여겼다더만 인자는 설이만 보믄 설이 아부지 입이 헤 벌어진다는구만. ”
“설이 고것이 그렇게 옹골차게 컸잖혀, 공부도 잘하지만도 여간 똑똑한 게 아니라니께. 사내 녀석들도 갸한테는 꼼짝들을 못 한다고 하잖혀.”
“개천에서 용 났다니께. 술에 노름에 쩔어 있는 즈그 아부지를 저렇고롬 사람 만들어놓고, 설이 고것이 용하기는 하제. 이렇게 우물도 설이네 것만 잘 나오고 말이여. 인자 설이네는 원이 없것제 잉?”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아직도 설이의 마음속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는 것이었어요. 아버지와 잘 지낼 때는 알 수 없는 미움이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솟구쳐 오르곤 했거든요.
“설이가 사내 녀석만 같았드라믄 월매나 좋겠냐? 내가 죽으믄 누가 제사를 지내 주것냐잉?”
옆집 박씨네 아들들이 주르르 몰려다니는 걸 볼 때면 설이 아버지가 꼭 한마디를 했거든요. 아버지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라치면 설이의 마음은 갑자기 딱딱한 돌처럼 굳어졌어요. 그러다가 말대꾸라도 해서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할라치면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었어요. 그 미움은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시한폭탄이 되기도 했어요. 그렇게 분노로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결국 설이의 마음은 마치 가뭄이 난 것처럼 말라비틀어져서 초라하게 바닥이 다 드러나곤 했어요. 사람들은 설이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하기 좋은 대로 저마다 한 마디씩 설이네 우물에다 뱉어놓고 갔어요.
“설이 고것이 복덩인갸벼. 글쎄, 그때 와 있잖은가? 서울서 봉사활동 왔다간 사람들 말이여. 설이가 그 사람들허고 지금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다잖혀.”
“야길 듣자니께 그 최영감네 며느리 말이제, 김끝옌가 뭣인가? 그 사람이 설이 초등학교 졸업하믄 서울로 데려가서 중학교를 보낸다는 구만!”
“그랴? 하긴 공부를 잘 허니께 장래가 보이는 갑제.”
“아니, 그것이 아니고 갸가 그새 성경책을 아주 열심히 읽는다잖혀. 누구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이 교과서 읽듯이 성경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는디, 서울 언니들한테, 교회라는 델 가고 싶다고 편지를 썼더니 그앨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는 구만!”
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가 다 맞는 말이었어요.
“아부지를 떠나야 해!”
설이는 아주 조용히 마음속으로부터 아버지를 밀어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서울이라는 꿈을 넣었어요. 아니 교회라는 꿈을 집어넣었어요. 설이가 읽은 성경책은 설이의 꿈의 물줄기를 서울로, 교회로 연결해 놓고 있었어요. 설이는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마당의 우물 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어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우물이에요. 꿈꾸는 우물의 물은 절대로 마르는 법이 없었어요. 성경책을 읽을 때마다 설이는 흑흑 흐느껴 울곤 했어요. 어떤 때는 목을 놓아 엉엉 울기도 했어요. 자신의 아픔을 알고 있는 분이 아주 가까이에서 설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제 그만, 울지 마!” 하고 눈물을 닦아주시는 걸 느낄 수가 있었거든요.
“설아, 널 사랑한단다. 아주 많이 많이......”
그리고는 설이의 어깨를 토닥거려주시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기도 했거든요.
“정말요?”
설이는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을 바라보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고는 한번씩 웃어 보인답니다.
“세상에 태어난 널 사랑해!”
그때 설이는 딸로 태어난 자기를 아주 많이 사랑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어요. 지그시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계시는 분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어요. 설이의 꿈꾸는 우물은 알 수 없는 사랑으로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