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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Jul 10. 2024

'세모임'이라는 이름으로

M형,

우리는 그 당시 왜 이런 호칭을 썼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여고 2학년이었고, 형은 남고 3학년이었는데요. 한 학년 아래 여고생이 위에 학년 남고생을 부르려면 "오빠"나 '선배'나, 뭐 그런 표현이 더 적절했을 텐데도 는 꼭 '형'이라고 불렀지요. 한 학년 위 여고생들에게는 '언니'라고 했기에 자연스러웠지만. 남고생에게 부르는 '형'이라는 호칭은 뭔가 어색하면서도 중성적인 느낌을 주었어요.


나는 초등학교를 한 해 늦게 들어갔기에 같은 학년의 아이들보다 나이가 한 살이 더 많았어요. 입학 당시 내가 키가 너무 작아서 시골에서 먼 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던 시절이라 학교를 늦게 보낸 거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따져보면 형이나 언니나 한 학년 위는 나와 동갑이었고 굳이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그럼 '선배'는 어때요? 무슨 회사도 아니고 그것도 영 어색했지요.


아무튼, 우리는 'M형'이라고 부르며 만남을 시작했어요. 은 나에게 이름을 불렀고, 손 편지에는 '아우'라고 썼지요.


아, 시작은 그랬네요. 형의 학교에서 우리 학교공문이 왔어요. <문학의 밤> 행사에 문예반 학생을 초대한다는 내용이었지요. 나는 그때 우리 학교 문예반 반장을 하고 있어서 지도하시는 작문 선생님이 를 불러서 다녀오라고 했지요. 무슨 서류 같은 걸 써서 주었던 것 같아요. 허락의 문서 같은 거였어요. 같은 문예반 친구 한 명과 형이 다니는 남고의 <문학의 밤> 행사에 갔었지요. 론 다른 학교 문학행사에도 갔어요. 그러고 보면 우리 학교가 꽤 개방적이었던 것 같아요.


M형은 그때 Y고등학교 연대장을 했어요. 문예반 반장은 따로 있었지요. <문학의 밤>이 끝나고 간단한 다과를 나누며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우리 집은 수유리에 있어서 형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튿날, 우리 학교 3학년 K언니가 우리 반을 찾아왔어요.

"내가 그 애들과 독서모임을 해. 어제 너네 만났다면서 너희 둘도 함께 하면 좋겠다고 하더라. 이번 주 토요일에 '모임'에 나와 보면 어때?"

독서모임 이름이 '모임'이라고 했어요. 좀 특이한 이름이죠! 친구들끼리 "~하세"라고 말하는 어미에서 따온 거라 했어요. 요즘 같으면 '~하자'라고 말하지 '~하세'라고 하는 친구는 별로 없을 거예요. 좀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또 몰라도 고등학생들이 쓰기에는 구식 표현이었죠.

"놀러 가자."

"놀러 가세."

어때요? 분명 '~하세'가 더 노티가 나는 표현이죠!


<문학의 밤>에 함께 갔던 친구는 그런 모임에 관심이 없었고 나는 가겠다고 했요. 장소는 바로 대학로에 있는 음악카페 학림다방이었어요. 물론 처음 만남은 거기 2층에서 했지만 독서모임은 형네 집으로 옮겨갔지요. 부모님이 참 좋으셨어요. 형은 외동아들이라서 애지중지하셨던 게 분명해요. 어찌 보면 고등학생인 우리는 미성년자였고, 남녀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하는 혼성동아리는 학교에서 공식적으로는 권장는 모임이 아니었거든요. 그때 용어를 빌리자면 지하 서클이었던 셈이에요. 그래서 형의 어머니가 만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사고(?)를 대비해서 집에서 독서모임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지요.


형의 집은 보문동에 나무 대문이 있는 작은 한옥집이었어요. 화장실과 부엌이 모두 재래식이었고, 안방과 마루, 그리고 형 방은 부엌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는 떨어져  있었지요. 수돗가가 있는 작은 마당이 있었요. 형 방에는 형이 그린 어린 왕자 그림이 벽에 붙어 있었요.


우리는 어려운 철학, 문학, 사회과학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김지하 시인의 시집도 거의 다 읽었고, 함석헌 옹의 <씨알의 소리>, 그리고 <어린 왕자>, <갈매기의 꿈> 같은 어른 동화도 읽었어요. 다른 것들은 잘 생각이 안 나네요.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어요. 형의 어머니가 분위기를 내라며 와인 같은 걸 주셨던 것 같고 우리는 얼음에 타서 그걸 조금씩 맛을 보았어요. 처음으로 술이라는 걸 마시면서 일명 올라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두꺼운 목화솜이불 한 장 속에 발을 넣고 빙 둘러앉아서 밤새도록 토론을 벌였고 그대로 거꾸러져 잠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서는 마당으로 나가다가 이불에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지요. 겨우 와인   정도씩 마셨는데도 속이 그걸 받아들이질 못했어요. 추운 겨울, 우리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무거운 솜이불을 빠느라고 엄청 고생을 했어요. 날씨가  추워서 커다란 대야에 받아놓은 물에 살얼음이 살짝 졌는데 그걸  떠서 이불에 실례한 부분만 비벼서 빨았지요. 손이 무 시렸어요. 그리고는  달아나서 눈은 말똥말똥해지고 머리가 지끈거렸어요. 형 어머니는 새벽 일찍 해장국도 끓여주셨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금기된 일이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았어요.


형은 키도 크고 아는 것도 많아 언니들도 좋아했고 물론 나도 아주 많이 좋아했어요. 교련이 있던 시절, 학교 연대장은 선두에서 군대 이끄는 지휘관처럼 멋졌거든요. 그때는 교련과목이 있어서 형도 연대장이었으니까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볼 수 있었지요.


그리고 형은 독서모임에 말도 논리적으로 잘했고,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썼어요, 또 공부도 잘해서 재수 한 번 하지 않고 단번에 S대 인기학과에 합격했어요. 독서모임을 함께했던 언니들과 다른 형들은 바로 대학에 간 이들도 있었지만 재수를 한 이들도 있었어요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입 원서도 내보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어요. 그러니 우리 간격은 점점 벌어졌지요.


형과 언니들이 대학에 들어가서도 세모임은 지속된 모양인데, 나는 더 이상 그 모임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대학생이 아니니까요. 대학에서는 새로운 멤버들도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그리고 K언를 통해 형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독서와는 다른 이야기였지요. 형이 연애를 한다는 거였는데, 정말 괴로웠어요. 그래서 형한테 손 편지를 제법 썼던 것 같아요. 나도 꼭 대학에 갈 거라고요. 대학에 가서 만나자고요. 그러고 보면 내가 꽤 용기가 있었요.


여기서는 형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형을 안 만났으면 나는 아마 대학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요. 대학에 가서 형을 꼭 만나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가정형편 상 학원에도 가지 못하면서도 계속 대학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이니까요. 수, 삼수의 길은 고단하고 외로웠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형은 내게 단 한 장의 답장만 보내왔어요. 저는 그 편지를 지금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너무나 너무나도 진솔한 아우 순오에게'로 시작되는 손 편지인데, 연필로 또박또박 썼지요.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라고 했요. 그것은 바로 '이성적으로는 안 좋아한다'는 의미였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좋았어요. 나는 S대에 가보려고 바둥거렸어요. 형과 동등한 관계에서 만나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내가 E여대에 입학할 무렵 형은 졸업을 했어요. 그리고 형은 결혼을 하고 미국유학길에 올랐지요. 그 후 형의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리는 각자 다른 세계를 살게 된 거죠.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어느 날, K언니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이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세모임 친구들 다시 만나자고요. 그래서 형을 만나보니 형은 H대학 교수였어요. 그리고 아내가 아파서 유학 중에 투병하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고, 자녀는 오누이를 두었다고 하더군요. 


나도 형이 나온 그 S대학의 역시나 최고 인기학과를 나온, 나에게 딱 맞는 사람과 7년 연애를 하다 결혼해서 아들, 딸, 두 자녀를 두었고요. 그리고 목회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얼마 후 형의 재혼소식이, 또 얼마 후 형의 발병 소식이 들려왔고, 또 얼마 후 형의 부고소식이 왔어요. 저는 그때 외국여행 중이어서 형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행 가기 전에 세모임 친구들과 함께 병문안은 한 번 었지요. 그때 형은 말했어요.

"이런 모습을 보여 주어서 미안하다."

"래요. 너무 열심히 살아서 그런 거요."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어요.


형은 세모임 친구 중에서 가장 잘 나가던 람이었는데 가장 빨리 시들어버린 꽃 같았어요. 환갑도 못 지내고 생을 마감했으니까요. 형은 형이 나온 대학의 대학원장도 했고 대한민국 무슨 위원회 자문위원 같은 것도 했었지요. 방학이면 부부동반으로 때로는 홀로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M,

K언니가 형을 북한강이 잘 보이는 산기슭 묘지에 묻었다고 톡 했어요. 언제나 강을 바라보며 영원한 안식을 하라고 했지요.


그러고 보니까 형 집안은 모두가 병 치례를 하다가 돌아가셨네요.  아내도 아버지도 어머니도요. 형은 꽤나 효성스러웠던 것 같아요. 아내는 물론 아버지 어머니의 병수발을 오랜 세월 집에서 했으니까요. 우리들에게도 부모님 같았던 분들이기에 병원으로 집으로 문안 인사도 갔었고, 장례식장에도 갔었네요. 집안에 한 사람만 아파도 분위기가 어두운데 오 병을 앓는 사람들이 연거푸 있는 집안이란 생각만 해도 우울해지네요. 우리는 아프지 않으려고 운동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쉼의 시간을 갖기도 하는 데요. 생사의 문제는 우리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 같아요.


M형, 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게 참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먼저 보낸 이들을 모두 만나셨나요? 아내도 아버지도 어머니도요. 이곳에는 재혼했던 아내와  아들, 딸만 남았네요. 그들이 형을 기억해 주겠네요.


나는 형이 하늘나라로 간 후 더 이상 세모임에는 나가지 않아요. 형에 대한 추억은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난 형의 무덤에 가보고 싶진 않았어요.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다, 생각했지요. 떠도는 바람결에 흐르는 강물에 흘러가는 구름에 형의 이름도 적어 보냈어요. 가끔 생각하죠. 그때 참 많이 좋아했던 형이었다고요.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아버지의 로망이었 S대에 대한 나의 꿈이었을지도 몰라요. 나는 형 대신 S대학을 나온 지금의 남편 만나 잘 살고 있으니까요. 그게 다 나를 '인간적으로만 좋아한다'는 형 덕분이기도 해요. '세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할게요, M형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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