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낙제를 한다? 유급을 한다? 그러면 이해가 될까? 아마도 그런 경우는 절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있다. 바로 내가 하마터면 그럴 뻔했다.
여고 2학년 시절, 나는 기말 시험을 치르지 않고 여행을 갔다. 그때 집에서 심한 압박을 받고 있어서 학교를 그만 둘 생각이었다. 날마다 학교에 다니지 말라는 아버지의 술주정을 견디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네다섯 시가 되면 소주병 두 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24시간 순댓국 가게를 운영하던 우리 엄마는 아마도 손님이 없어서 쪽잠이 들었을 것이고 낮에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잠을 잘 수 있었던 우리 아빠는 그 시간쯤에는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옆에 있어야 술맛이 나는 법, 아버지는 술병을 들고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는 엄마가 단돈 500만 원에 방이 7개나 있는 집을 사서 우리는 엄마 가게와는 조금 떨어진 안채에서 살 때였다. 식당에서 집까지는 한 5분 거리였다. 작은 마당이 있는 우리 집은 방마다 부엌이 딸려 있어서 세 놓기가 좋았다. 방 2개를 우리가 쓰고 방 5개를 세 놓았다. 내가 큰딸이어서 그랬던 것인지 자꾸만 공부를 하려고 해서 그랬던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 집에서 나만 유일하게 내 방이 있었다. 할머니와 동생들이 모두 함께 생활하는 안방은 마루에 딸린 여닫이 문이었고, 내 방도 마루에 붙어 있었는데 미닫이 문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내 방 문 앞 마루에 앉아서 문을 반쯤 열어놓고 소주를 병째 마시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 또 하고 그칠 줄을 몰랐다. 급기야 내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서 학교로 향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아마도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해서 마루에서 그대로 고꾸라져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할머니가 새벽에 일찍 깨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이불을 덮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정으로 인해 도시락도 싸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 점심시간이 되면 류관순 우물이 있던 자리, 커다란 오래된 은행나무 근처를 맴돌며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정말이지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기말시험을 안 치면 낙제나 유급을 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학교를 그만두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일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S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 한두 해 준비해 보다가 적성에 안 맞는다며 바로 우리 학교 사회 선생님으로 오신 심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이셨다. 눈이 부리부리한 20대 중반의 새파란 새내기 남자 선생님이셨다.
심선생님은 2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나를 부르셨다. 오후에 모든 과목 시험을 치라는 것이었다. 몇 과목을 빼고는 대체로 주관식 시혐이었다. 절대 백지는 내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거의 글짓기를 하다시피 시험을 치렀다. 그 과목에 대한 한 학기 동안의 소감들,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들, 그리고 우리 집 형편과 삶과 죽음, 공부와 진학에 대한 내 생각도 적었다.
다행히 나는 담임이신 심선생님 덕분에 낙제도 유급도 면하고 무사히 3학년에 진급을 했다. 1학년 마치고 받기 시작한 교목실 장학금 수혜도 3학년 때까지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성적 장학생이 아니라 교목실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기에 성적이 그리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심선생님은 애들을 무지 애정을 가지고 돌보신 분이셨다.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애들을 잘 챙기셨다. 특기가 있는 애들 사정도 잘 헤아려주시고 용기도 주셨다. 좋은 책이나 학습 참고서를 사서 그 안에 손 편지도 끼워 넣어 주시곤 했다. 어려워도 희망을 잃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면 미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가끔 방학이 되면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심선생님이 적어주신 손 편지들을 단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참고서들을 처분하면서 그 안에 편지가 그대로 끼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고를 졸업하고는 기약 없는 대입의 꿈을 접기 위해 교과서와 관련된 책들은 거의 다 없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깨닫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얘기할 데가 없었던 것일까? 4대 독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형제자매도 없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장사를 하느라 늘 바쁘셨으니까 일이 없는 아버지만 한가했던 것이다. 여고생인 나에게 대고 자기 하소연을 하던 아버지가 안쓰럽게 다가온다. 엄마와 내가 18살 차이니까 아버지와 나는 21살 차이이다. 그 당시에 실제 나이보다 조숙했던 나는 아버지의 좋은 대화상대가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러질 못했다.
또 고마운 이들이 많았다.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위급할 때마다 나를 도와주신 선생님들이 그렇다. 그분들과의 관계에서 손 편지는 큰 역할을 했음에 틀림이 없다. 선생님들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신 데는 진심을 담은 손 편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혼자서 본 기말 시험 역시 내가 쓴 손 편지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손 편지로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된 사람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교목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써주신 1학년 때 담임 장 선생님(후에 외고 교장선생님을 하시다가 정년퇴임하셨다)과 교목이신 이 목사님, 글 잘 쓴다며 칭찬해 주신 국어 선생님과 작문 선생님들, 그리고 생명의 신비에 대해 알려주신 생물 담당 권 선생님(곧 외국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시고 큰 교회 담임 목사님이 되셔서 목회하시다 몇 년 전에 은퇴하셨다), 조회 중 단상에 올라가 백일장에서 타온 상을 받을 때 어깨를 다독이시며 '글 잘 쓰는 거 멋진 일'이라며 격려해 주시던 실력있는 여성 지도자 모델 정 교장선생님, 헤아려보니 고마운 분이 한둘이 아니다. 이분들과도 자주 손 편지를 썼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리운 손 편지 시절 추억이다. 손 편지를 주고받던 선생님들의 칭찬과 격려와 응원이 아직 내가 글 쓰는 일을 꿈꾸고 있는 이유일런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