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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Jul 17. 2024

그때 고백하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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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6월 말에 약 한 달간  6명 잔차인들과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다녀온다며 떠났지. 나에게 톡을 보내왔어. 예전 같으면 편지를 보내왔을 건데, 지금은 주로 톡을 하니까.

"그래 잘 다녀와."

나도 톡으로 답문을 보냈지.

먹을 거 입을 거 다 준비해서 간다고 했지. 자전거도 분해해서 가져가고, 텐트도 가져간댔지.


그곳은 해발 4,000m 고지까지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오르내린다 했지. 가보지 못한 곳이라 아득하네. 네가 여기 한국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주 멀게 느껴지네. 사람들은 실제 거리가 주는 느낌보다도 마음의 거리가 더 문제라고 말들을 하지만 난 꼭 그렇지만 않다고 봐.

 

여중 여고시절에 나는 여행을 즐겼고, 너는 아마도 시골에 살았으니까 농사짓는 부모님을 도와 일하고 집 주변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누볐거나 그랬을 듯해. 그래서 지금네가 더 원시적인 여행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고. 나는 외국보다는 한국이 좋아 매주 한 번은 집을 떠나지만, 아주 먼 곳에 대한 로망은 없는 것 같아. 더군다나 환경이 다른 이국땅에 대한 열정 같은 건 없는 거지. 래서 네가 돌아와서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어.


여고시절 나는 대입시험을 치른 후 교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을 입고 여행길에 나섰지. 남원운봉산양목장에서 너를 만났지. 너는 그날 드라마를 찍는데 같은 학교 아이들이 나와서 엑스트라 군중으로 참여하고 있었다고 했. 혼자서만 살짝 빠져나와 양떼를 지켜보고 있었다지. 나는 혼자서 양떼를 보러 갔었어. 그 순간에 우리는 만났어.

"여기서 어디 돌아볼 민한 곳이 있나요?"

 나는 물어봤고 너는 황산대첩비지까지 동행해 주었지.


그때 주고받은 대화들 중 딱 한 가지만 기억이 나.

"농사를 짓더라도 공부를 계속해야 할까요?"

너는 물었고 나는 대답했지.

"그 무엇을 하더라도 공부를 계속하면 미래가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고, 나 자신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어.

"대학을 가야 하는 걸까? 이대로 말아야 하는 걸까?"

바로 진학했으면 서울에 있는 여대 정도는 무난하게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우리 집에서는 진학을 반대했기에 난 원서도 쓸 수가 없었거든.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어. 나는 네게 주소를 가르쳐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런데 네가 우리 학교로 편지를 보냈던 거지? 그 편지를 받고 고마워서 난 답장을 썼고, 그렇게 우리가 손 편지를 주고받았었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네. 난 대학에 못 들어가고 재수생활도 시작하지 못한 채 그냥 붕 뜬 상태로 지냈고. 넌 나보다 한 학년 아래라서 그때 고3이었으니까 아마도 입시 준비에 바빴을 거고.


여행길에서 만난 너, 너는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너의 롤 모델이었다고 했지.

"첫눈에 반했지."

너는 그렇게 표현했는데, 깊은 사정은 모른 채 여행하는 소녀라 멋져 보였을지도 몰라.

"S대에 가서 만나."

너는 내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면서? S대에 가서 본고사도 보았다면서? 세상에나 얼마나 대단한 용기야. 그 시절, 나는 단 한 번도 그곳에 가서 시험은커녕 그 학교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네가 36년이 지난 어느 날 SNS에서 날 찾았을 때, 나는 마침 일터를 지리산 지역에 얻어서 내려갔을 때이고 우리는 다시 만났지.

"덕분에 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얻었어요."

너는 내게 맛있는 것 선물사주고 좋은 곳에도 데려가 주었어. 문학관, 고택, 그리고 우리가 걸었던 길 등 네가 자전거 타고 다던 아름다운 곳을 안내해 주었지.  


난 네가 보낸 편지들을 다 가지고 있어. 너는 내가 보낸 편지들을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를 잊지 못하는 너는 나의 흔적을 보관하지 않았는데, 너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 여겼던 나는 네 기록들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그럼 누가 더 잘 기억해 준 걸까?


어쨌든 네가 그 시절에 편지에다라도 단 한 줄이라도 나를 좋아다고 썼으면 어땠을까? 아니 내가 너를 좋아다고 고백했으면? 근데 난 그때 널 안 좋아했어. 난 그때 무지 좋아했던 형이 있었거든. 바로 앞에 쓴 글에도 밝혔지만,  M형 말이야. 서로 비껴갔던 거네. 그때 네가 나에게 아주 객관적인 누나와 남동생 관계가 아닌 그 어떤 다른 관계를 원했다면 우린 손 편지도 계속 이어가지 못했을 거야, 아마도!


근데 나는 너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하지.

"그때 고백하지 그랬어!"

그렇지만 우리는 딱 36년 후에 만날 운명이었던 거야. 결혼도 하고 아들 딸도 낳고, 너는 잔차맨으로, 나는 산행과 여행을 좋아하는 뚜벅이로 말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일찍 끝이 났을 테니까.


내가 간직한 편지들 중에는 그가 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도 있어. 분명 한때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언제 어떤 사람과 편지를 한 건지 잘 모르겠는 거지. 그러면 편지를 없애도 되는데 안 버리고 두는 이유는 뭘까?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추억을 먹고 살기 위해서야.


인,

여행에서 돌아오면 곧 연락해. 흥미진진한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낯선 나라의 여행 이야기 직접 들어봐야지. 언제까지나 좋은 친구로 남아있길 바라면서 네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어. 잔차 여행 가는 날은 물어보면서도 돌아오는 날은 안 물어봤네. 난 잘 그래. 그날이 언제일까? 너에게 '한국에 잘 도착했다'는 톡이 오는 날이겠네. 전하게 재미있게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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