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는 18살 차이이다. 우리 엄마는 18살에 시집을 와서 19살에 나를 낳았다. 우리 늦둥이 남동생이 나랑 18살 차이인 걸 보면 엄마와 나는 큰언니와 막내 동생이라고 불러도 크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4대 독자 집안에 시집을 와서 아이를 10여 명 낳았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아이를 집에서 낳았는데, 반은 살고, 반은 죽었다고 한다.
내가 큰딸인데, 내 위로도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사내아이였는데 낳아보니 숨을 쉬지 않아서 무척 가슴 아파했단다. 그리고 나를 낳았는데,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아들이 아니어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다행히 나는 남자애들 못지않게 영리해서(집안 식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남자처럼 커주기를, 크게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내가 아들이 아니라서 엄마에게는 집안에서 떵떵거릴 수 있게 위신을 세워주지는 못한 존재였다고나 할까?
더군다나 6.25 때 할아버지를 잃고 나이 서른에 청상이 된 할머니는 나를 독차지하고 젖먹일 때를 제외하고는 엄마에게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잘못해서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 때리려고 하면 할머니가 그 매를 빼앗아서 엄마를 때렸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린것이 잘못할 수도 있지. 어디 때릴 데가 있다고 매를 들어?"
할머니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단다.
나는 작은 방에서 할머니와 둘이 잤고 할머니 빈 젖무덤을 만지며 자랐다. 엄마와는 젖을 빤 기억도 목욕을 같이 한 기억도 없다. 서울로 이사 와서 목욕탕에 갈 때도 할머니와 둘이서 갔다. 입학식 때도 졸업식 때도 늘 할머니가 동행을 해주었다. 혼자서 식당을 운영하던 엄마는 장사를 하느라고 늘 바빴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여중 1학년 말, 전학 수속도 안 해 주어서 내가 직접 전학서류를 떼러 먼 시골 고향으로 내려갔었다. 지금은 온라인이 발달되어서 전학하는 학교에서 그냥 서류를 전학할 학교로 이메일 같은 것으로 보내줘도 될 것 같은데 당시에는 직접 서류를 떼어다 제출해야 했다. 내가 다니던 여중학교는 서울 수유리 집에서 서울역까지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서 광주터미널까지 기차를 타고, 또 광주에서 영광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13살 여중학교 1학년 짜리가 혼자 가기에는 터무니없이 멀고 위험한 길이었다. 그래도 나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용감하게 그 일을 잘해 내었다. 거기다가 영광에서 버스를 한 번 더 타고 법성포 쪽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여동생 전학서류까지 떼어오는 강단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엄마는 늘 내가 필요해서 손을 내밀면 돈이 없다면서 제때 주지 않았다. 준비물이나 학용품 사는 일도 등록금 내는 일도 그랬다. 나는 가정 시간이나 과학 시간에 준비물을 안 가져간 채 수업하기 일쑤였다.
전학하던 첫 날도 가정시간에 촛불을 겨놓고 여러 가지 섬유를 조금씩 태워 가면서 적는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준비물 없이 멀뚱하게 앉아서 옆 짝꿍이 실험하는 걸 보면서 공책에 결과를 적어 나갔다.
또 있다. 영광에서는 겨울에 교복 바지를 입었는데, 서울에 와 보니 치마를 입었다. 교복 색깔도 시골에서는 검정색인데 서울은 짙은 감색이었다. 그래도 집에서는 교복을 새로 맞추어줄 처지가 안 되어서 그걸 입고 여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다들 감색 교복에 치마를 입는데 나만 검은색 바지를 입고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전학을 오면 깔끔하게 새 교복을 맞추어 입었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학교에서는 전학생의 경우 바지 입는 것도 허락을 했지만, 나는 상당히 열등감을 느끼면서 꾹꾹 참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이렇게 무심한 엄마가 아니 아빠도 내가 여중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집안 형편이 어렵다면서 여상 진학을 권했다. 그렇지만 나는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다. 내 꿈이 작가였으니까 그 길이 유일한 진로라고 생각했다. 누구 가르쳐 주는 이가 없으니 작가가 되려면 꼭 대학 국문과에 진학해야만 되는 줄 알았다.
아, 편지 이야기를 쓰려다 엉뚱한 데로 한 바퀴 돌았다. 그렇지만 다 엄마와 나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이야기들이다.
각설하고, 나는 여고 진학을 한 후 가끔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돈이 필요할 때면 엄마 금고에다 미리 편지를 써서 넣어두고는 다음 날 가서 달라고 했다.
"엄마, 고생하는 거 내가 다 알아요. 그렇지만 공부를 해야 미래가 있지 않겠어요? 다행히 학교에서 장학금도 주셔서 큰돈은 들어가지 않잖아요.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준비물은 꼭 필요해요. 소풍도 나만 안 가면 친구들이랑 친해질 수 없어요. 소풍비랑 간식비 꼭 챙겨주세요. 이다음에 제가 잘 되어서 오늘을 이야기할 날이 있을 거예요. 엄마 은혜는 꼭 갚아드릴게요. 엄마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 - 큰딸 순오 드림."
뭐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 엄마는 내 편지에 깜빡 속아서 내가 원하는 만큼 돈을 주셨다. 때로는 더 후하게 주실 때도 있었다. 하긴 내가 명문여고에 배정이 되고 교목실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기에 나에 대한 기대감이 컸을지도 모른다.
내 손 편지는 엄마를 설득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엄마는 또박또박 쓴 내 장문의 편지에 위로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었다.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아 엄마가 나를 의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동생들 진로에 대해서는 거의 나와 상의를 했다. 나는 내가 해쳐 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동생들은 진로 선택을 잘했다. 그래서 동생들 중에는 건축기사도 있고 대학병원에 근무도 하고 대형슈퍼도 운영해서 제법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까 나는 엄마를 닮은 점이 참 많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머리 좋은 우리 엄마를 닮아 공부를 잘했고, 또 산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를 닮아 산을 잘 탄다. 글쎄! 우리 엄마가 장사를 하는 바쁜 중에도 동네 산악회에 들어서 대한민국 안 가본 산이 없단다. 우리는 그저 엄마가 경동시장, 광장시장, 소래시장 같은, 집에서 조금 먼 시장에 가서 싱싱한 생선이나 고기, 젓갈 등 장을 봐 오는 줄만 알았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집에 가보면 할머니가 가끔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때 엄마가 산에 간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 엄마는 자전거를 탄다. 한때는 오토바이도 탔다. 한 번 크게 사고가 나서 얼굴 수술을 하고부터는 오토바이는 안 탄다. 산에도 거의 매일 간다. 동네 앞산이다. 우리 친정 동네는 10여 분만 걸어가면 아주 낮은 산이 있다. 능선 따라 걸으면 한 30여 분이면 반 원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가 있다. 방향은 오른쪽이나 왼쪽이나 어느 쪽을 먼저 선택해도 난이도도 거리도 비슷하다.
나도 결혼하기 전에는 앞산에 가끔 올랐다. 누가 집으로 찾아오면 데리고 가서 함께 걸었다. 숲이 우거져서 참 좋다. 우리 남편과 사귈 때도 자주 갔다. 먹을 것을 싸들고 가서 걷다가 쉬면서 먹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는 앞산에 혼자 올라가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릴 때도 가끔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엄마가 담임 선생님한테 편지를 썼던 적이 있다. 학년 중간에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다. 새로 오신 젊은 남자 선생님은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그런데 3학년이 되고 그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내가 학교 대표로 읍내에 백일장을 갔는데, 그 선생님이 다른 학교 인솔자로 오셨다. 나는 내물 거리면서 선생님한테 고개만 한 번 까딱하고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엄마한테 편지를 썼다.
"글쎄, 인석이 달려와서 '선생님'하고 와락 안길 줄 알았는데, 벌써 내외를 하더라니까요."
선생님이 아주 많이 섭섭했다는 이야기이다. 실은 내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그런 것인데 선생님을 그걸 몰랐다. 이름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박용백 선생님,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실까?
초등학교 짧은 가방줄로 삐뚤빼뚤 맞춤법도 틀린 글씨로 우리 담임 선생님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엄마, 내가 손 편지를 그리도 좋아한 것은 아마도 엄마를 빼닮은 것이리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아빠와도 연애편지 깨나 쓰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아빠처럼 잘 생기고 명필이셨던 사람이 우리 엄마처럼 키도 작고 아담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그 연애편지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저 짐작을 해볼 뿐이다. 엄마가 아빠를 만나 고생도 많이 했지만, 두 분이 만나 내가 있기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엄마는 아셨을까? 내가 공부 욕심 때문에 엄마에게 손편지를 썼던 것을 말이다. 내 편지를 읽은 엄마는 내게 기쁘게 돈을 주면서 그랬었다.
"글쎄 애 공부는 시키라는 것인지 애 돈을 주고 나면 신기하게도 장사가 두 배 세 배로 잘된다니까요. 그러니 안 줄 수가 없지요. 애한테 돈을 주는 게 더 남는 장사니까요."
그렇게 나는 손 편지의 덕을 보며 무사히 여고뿐만 아니라 대학도 나오고, 대학원도 두 군데나 다녀서 가방끈이 꽤 긴 사람이 되었다. 그 어려운 집안 형편에 손 편지가 아니었으면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손 편지를 생각하면 그저 감사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손 편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