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아,
너의 이름을 부르면 못다 한 이야기가 한꺼번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구나! 내 기억 속 너의 이름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너는 나와 해연 오빠 만남의 시작이었지. 내가 너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다면 난 오빠를 알지 못했을 거야. 지금은 아득한 꿈속 이야기 같은 노란 해바라기, 해연 오빠는 너를 통해서 내게로 왔어. 오빠는 고흐가 그린 샛노란 해바라기, 해를 향해서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의 한결같은 모습이 좋다고 했지.
나는 자아도취에 빠진 하얀 수선화가 좋다고 했어. 시골에서 1, 2등을 하던 내가 서울에 와서 첫 시험을 보니까 반에서 10여 등을 했더라. 시골과 서울 교육수준의 차이를 보여주는 결과였지.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굿굿했어. 나르치스가 물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반한 것처럼 나는 내 얼굴을 오빠의 거울에 비추어 보며 자존감을 세워가고 있었지. 일기도 편지도 열심히 썼고, 시도 산문도 써서 학생 잡지 같은데 보내기도 했어. 당시에 <학생중앙>이 있었는데, 그곳에 내 시와 산문이 여러 편 실리기도 했단다.
그 시절 썼던 시 하나를 적어볼 게. 이것도 그 잡지에 실렸던 건가 싶지만, 뽑혀서 실린 시에는 격려와 응원이 가득했지. 힘을 얻고 계속 글을 써 나갔어.
편지 / 서순오
비가 내려
창으로 슬픈 가락이 흐르고
무엇인지 그리워
마음속에 눈물이 배는 날은
딱딱한 책상을 대하고
흰 모조지에
편지를 쓰고 싶다
미웁고도 그리운 이들에게
다정하고 고마운 이들에게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들에게
그리고
고고한 내 하나만의 너에게
불붙는 시 같은
편지를 쓰고 싶다
너는 가야여중에 다녔고 난 도봉여중에 다녔지. 나는 내 앨범에 네 사진을 가지고 있고, 너도 아마 내 사진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찾으려면 찾을 것도 같아.
그런데 우린 40여 년이 훌쩍 넘긴 이 시점까지 서로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로 살고 있구나.
"너, 내 소식 궁금하지 않아? 정말로!"
난 네 소식이 무척 궁금해.
"서울로 이사온다고 했는데,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난 서울에 살다가 수원으로 이사 온 지 10여 년이 되어 가. 시어머니가 수원에 살고 있어서 오게 되었어. 90이 넘으셔서 울 남편이 뭐 필요할 때 함께 해드린다고 해서 시댁 근처로 왔지.
너와 나는 해연오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넌 마지막 편지에서 내게 "꼭 그렇게 하자"라고 약속했었는데 왜 다시 연락을 안 한 거야?
그렇지만 난 널 이해해. 한 때는 건강하던 오빠가 어느 순간에 발병하여 병원에서만 지내다가 하늘나라로 갔으니까 말이야. 넌 더 이상 오빠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자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니까. 해연 오빠는 '피부 수측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고 했잖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 검색을 해도 그 병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기록된 게 없더라. 아니 병명 자체가 검색이 안 되었어. 그래서 포기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 혹시나 하고 해연 오빠 이야기를 쓰면서 검색을 해보니까 부분적으로 나오고 여전히 검색이 안 되더라 그래서 뤼튼에 물어봤더니 이렇게 나오더라.
피부 수축증 (Skin Atrophy) :
피부 수측증(피부 위축증)의 주요 증상은 피부가 얇아지고 탄력이 감소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피부가 쉽게 찢어지거나 멍이 들기도 한다. 진단을 위해서는 피부 생검, 혈액 검사, 영상 검사 등이 필요할 수 있다.(뤼튼 AI)
내가 이해하기로 '피부 수축증'은 몸에 반점이 생기고, 피부가 꺼져서 군데군데 벌레 모양의 홈이 생기고, 피부의 탄력이 줄어드는 그런 병이더구나.
나는 비로소 해연 오빠가 내게 사진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어. 누구나 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잖아. 오빠는 자꾸 사진을 보내달라는 내 앙탈에 많이 괴로웠을 것 같아. 나는 오빠를 어르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면서 오빠의 모습을 궁금해했거든.
왜 문득 <노트르담의 꼽추 이야기>가 떠오르는 걸까? 어여쁜 공주님을 사랑한 '노트르담의 꼽추'는 행복했을 거야. 비록 몸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 마음과 정신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고결했으니까.
우리는 세 가지의 사랑에 대해 알고 있잖아. 아가페(부모님의 정신적인 사랑), 에로스(남녀의 육체적인 사랑), 플라토닉 사랑(친구의 우정) 말이야. 나는 그 어느 사랑이라도 똑같이 다 소중하다는 생각이야. 사랑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는 거지.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이야. 성경에도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지. 거의 모든 문학 작품과 예술도 이 사랑을 노래하지.
나는 사랑 중에서도 어긋난 사랑, 이루지 못한 사랑, 이루었으나 곧 사라진 사랑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여봐. 말을 바꾸어 보면, 결국 나도 '사랑'에 대해 쓰고 싶은 거지.
나와 해연 오빠는 플라토닉 사랑(우정)을 나눈 게 아닐까 싶어. 그때 무척 행복했거든.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던 순간들이 영화처럼 자주 떠올라.
숙아,
우리, 한때 사춘기 시절, 한없이 정겨웠던 그 추억을 곱씹으며 살아가자꾸나. 추억이 있는 한 우린 함께 하는 거야. 너와는 늘 이렇게 마음의 편지를 주고받지.
이담에 해연 오빠랑 같이 하늘나라에서 만나자. 그때는 너도 나도 오빠도 가장 예쁜 모습으로 재회해서 못다 한 이야기를 언제까지나 풀어내 보자. 우리 이야기는 영원의 실타래가 되어 풀리고 풀려서 온 세상을 돌고 돌 거야. 하늘 구름 사이로, 은하수와 별들을 헤치고, 바다 수평선과 파도가 되어, 드넓은 들판 새싹과 꽃으로 피어, 호젓한 산길 불타는 단풍으로, 추운 겨울 하이얀 눈꽃송이 설렘으로 말이야.
보고 싶은 숙아,
언제 어디에 있든지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지내렴. 나중 또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