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 오빠,
이제는 이름을 불러도 괜찮을 것 같아요. 왠지 그 이름이 더 다정하게 느껴져요. 나는 오빠의 이름을 내 성에 붙여서 필명으로 쓴 적도 있어요. 습작 시절에 소설 동아리에서 동인지를 낼 때요. 오빠는 내게 '좋은 글 쓰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준 사람이니까요. '진심을 담아 감동을 주되 상상력이 풍부하게 써야 한다'라고 했지요.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이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시절은 더 오래되었네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해서 중학교 2학년 가을까지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이네요. 펜팔친구였던 오빠의 친 여동생 숙이가 우리를 연결해 준 셈이에요. 아니,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의 편지가 내게 날아왔어요. 발신인 난에는 숙이의 주소와 함께 이름 대신 '노란 해바라기'라는 별명이 쓰여 있었지요. 오빠는 숙이에게 쓴 내 편지에서 주소를 알아서 몰래 내게 편지를 쓴다면서 괜찮냐고, 비밀로 해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나는 알았다고 곧 답장을 보냈었지요. 나도 뒤질세라 '하얀 수선화'라는 별명을 지어서 편지 겉봉에 썼고요. '노란 해바라기'와 '하얀 수선화'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죠.
오빠가 '노란 해바라기'를 별명으로 쓰는 것은 고흐의 샛노란 해바라기 그림이 좋아서였다고 했죠. 나는 물가에 핀 '하얀 수선화'의 고고한 나르시시즘이 좋았어요. 물속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서 그만 물속에 빠져 죽고 만 나르치스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모습을 가장 사랑한 미소년이니까요.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는 숙이와는 편지를 자주 하지 않은 듯해요. 어쩌다 한 번씩 학교 소식 같은 걸 전하고, 사진도 주고받았지만요. 그렇지만 세상에 비밀이라는 게 있겠어요? 그것도 내가 한 집에 사는 두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말이에요. 오빠와 숙이가 오누이인 게 다행이었지요. 숙이는 곧 알게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자연스럽게 나는 오빠에게 숙이 소식을 묻기도 하고 숙이에게 오빠 소식을 묻기도 했지요.
오빠는 한 번도 내게 사진을 보내진 않았어요. 물어보니 오빠도 숙이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거라고 이해해 달라고 했지요. 정말 궁금했어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밀도는 자꾸 높아지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숙이에게 내 사진을 보냈기에 오빠는 내 모습은 알고 있었지요, 오빠 나이는 숙이보다 두 살 많다고 했으니까 나보다는 한 살 많았을 거고요. 라디오 방송 듣기, 편지 쓰기가 취미이고, 시도 좋아한다 했어요. 참 나는 그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오빠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고 했어요.
큰딸로 태어나서 오빠가 없는 내게 해연 오빠는 친오빠처럼 친절했어요. 오빠는 내게 시나 산문이나 뭐 그런 글 쓴 거 있으면 보내라고 했지요. 나는 자주 글을 써서 보냈어요. 그러면 꼼꼼하게 읽고 내 글에 대한 솔직한 소감과 평을 해주었어요. 어떤 때는 글에 감동과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아쉬워할 때도 있었고요. 그러면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이런 글 저런 글들을 써 보냈던 거 같아요.
당시에 써 보낸 시 하나가 생각나네요.
밤 / 서순오
어둑이 익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본다
까만 밤의 고요 속에
별빛이 쏟아지고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
들릴 것만 같다
그리고 오빠는 늘 시와 성경 시편들을 적어 보내주었지요. 윤동주 님의 <서시>, 이육사 님의 <청포도>, 유치환 님의 <행복>, 박재삼 님의 <밤바다에서> 등은 오빠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물론 성경 시편 23편과 1편, 고린도전서 13장도요.
나는 오빠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편지 내용도 시도 성경 시편들도 저절로 다 외워졌지요. 길을 걸으면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쉬는 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면서, 나는 외우고 또 외웠어요.
어느 날 오빠는 곧 서울로 이사를 할 거라고 썼어요. 나도 서울로 이사를 한 후여서 곧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요. 그런데 오빠는 얼마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편지 한 장을 보내왔어요. 그것은 오빠의 장례식에 대한 편지였어요.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했지요. 오빠는 그동안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피부수축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어서 늘 병상에 누워서 지냈다고 했어요. 이제 10월 18일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적고 있었어요. 나를 만나보지 못해 아쉽다고 했어요. 편지도 발신인도 모두 오빠였지만, 편지는 숙이가 부친다고 추신에 별지가 붙어 있었어요. 그리고 서울 주소는 없었기에 그것이 우리 만남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지요.
해연오빠,
내가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은 건 꿈이 아니죠? 저는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어서 이다음에 크면 오빠같이 다정다감한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오빠를 마음 깊이 사모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오빠의 편지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너무 아껴서 따로 보관을 했는데, 이사를 다니면서 어느 책꾸러미에 쓸려서 버려진 듯해요. 또박또박 이쁜 글씨로 쓴 오빠의 편지는 가지고 있다면 내게는 보물이 되었을 거예요.
해연 오빠,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가면 그때 반갑게 만나요. 오빠가 마지막에 쓴 편지에서 내가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으니까요. 그때 만나면 '노란 해바라기'와 '하얀 수선화'의 못다 한 이야기들을 주절이 주절이 풀어내봐요. 죽음도 슬픔도 고통도 없고, 시집장가도 가지 않는 그곳에서 우리, 오빠동생으로 다시 만나요. 아니 다정한 친구로 영원히 함께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