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지금은 다른 이름을 쓰고 있기에 그때 너의 이름을 불러도 괜찮을 것 같지만, 그냥 이렇게 부를 게. 초등 친구들은 그 이름을 말하면 누구인지 다 알 테니까 말이야.
우리는 다른 애들보다 유난히 키도 컸고 공부도 잘했어. 아니, 공부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뛰어났지. 너는 운동도 잘했고, 나는 글짓기와 그림, 서예도 잘 썼어. 교내 대회, 교외 대회에서 상도 많이 탔지.
홀아비, 홀어미, 그 당시 우리 두 사람의 별명이었던 걸로 기억해. 우린 맨 뒷자리에 짝꿍 없이 혼자 앉았지.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거야. 우리가 힘이 약했다면 꽤 놀림을 받았을 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은 없었지.
너는 반장이고 나는 부반장이었어. 그때는 반장은 주로 남자가 했고, 여자는 부반장을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네가 내 짝꿍이고, 유일한 남자 친구이고, 아니 사춘기 시절 첫사랑이고 그랬어. 나는 네가 참 좋았어. 너를 보면 마음이 설렜지. 네 옆을 스치기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했어. 안 그런 척 능청을 떨었지만 말이야.
너는 언제나 급식시간에 양동이를 들고 다니며 그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빵을 한 개씩 꺼내서 나눠 주었지. 그러다가 어쩌다 남으면 나에게만 살짝 하나를 더 주기도 했어. 뽀얀 우유 덩어리랑 함께 먹는 그 옥수수빵이 얼마나 구수했던지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그뿐만이 아니야. 짓궂은 남자애들이 줄넘기를 하는 우리 여자애들 고무줄을 끊어서 채 가면 그 애들을 잡아서 따끔하게 혼내주고 다시 찾아서 이어주곤 했지. 우리가 공기놀이를 하고 있으면 공깃돌을 흩뜨려놓고 도망치는 개구쟁이들도 끝까지 찾아서 혼줄을 내주었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네가 마치 내 남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어. 네가 가까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했지.
우리 모두가 집이 멀었는데, 나도 집이 꽤 멀어서 약 4km 정도를 날마다 걸어서 학교에 다녔어. 혹 늦잠을 자서 지각이라도 할라 치면 교문에서 주번을 서던 너와 눈을 한 번 맞추고는 그냥 막 뛰어서 들어가기도 했어. 너는 웃으면서 눈을 감아 주었지.
생각해 보니 고마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네가 없었으면 내가 초등학교나 제대로 졸업을 했을까 싶어.
초등학교 6학년 그때 우리 집은 한 바탕의 회오리바람이 불었어. 잘생기고 멋쟁이에다 한량이셨던 우리 아버지가 그만 술꾼이 되고 말았거든. 거기다가 농사일은 안 하고 날마다 마을 주막에 가서 죽치고 앉아서 내기 화투도 치고 그랬어. 나중에는 그게 판이 큰 노름판이 되고 말았어.
나는 어디 마음 둘 데가 없었단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일하러 갔을지도 몰라. 그때는 다 그랬잖아. 집안이 어려운 친구들은 서울 가서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했으니까. 나이 어린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던 시대였던 것 같아.
다행히 나는 졸업 후에 읍내에 있는 여중학교에 진학을 했고, 반 배치고사인 첫 시험에서 전교 3등을 했단다. 학년마다 반은 3반까지 있었는데, 촌시골에서 온 아이치고는 내가 공부를 잘한 거래. 등수대로 반장이 되었는데, 1등은 1반, 2등은 2반, 난 3반 반장이 되었단다.
졸업 후 곧바로 네 소식을 듣지는 못 했어. 너의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처럼 술꾼이어서 네가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는 이야기 정도가 전부였지. 참, 네가 체육중학교에 특차로 가려고 했는데, 거기에도 뒷바라지가 필요해서 결국 못 갔다는 얘기도 들렸어. 마음이 짠했지.
그리고 소식이 두절되었어. 나는 겨울 방학에 서울로 이사를 했거든.
중학교 1학년 입학하고 나서 우리 집은 또 한 번의 회오리바람이 일었단다. 아니,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릴 것 같은 거센 폭풍이었지. 아버지 대신 근근이 가정을 꾸려가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모두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단다.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난 이튿날이었지. 잠을 자고 눈을 떠보니 엄마가 없었어.
다행히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계셔서 우리들을 돌봐주셨단다. 내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고, 남동생도 둘이었는데, 막내 남동생이 아직 젖먹이였을 때라 할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어.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며 젖을 얻어 먹이기도 했지.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잖아. 좋은 일이 안 좋은 일로, 안 좋은 일이 좋은 일로, 자꾸자꾸 바뀌는 걸 말해주는 고사성어지. 그래서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 보지 말고 더 멀리 내다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해.
나는 읍내 중학교에서 반장이 되어서 좋았지만, 엄마가 집을 나가서 사춘기의 열병을 아주 크게 앓았어. 그렇지만 또 약 1년 정도 되어서 엄마를 찾으면서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를 했단다. 엄마의 가출이 나를 서울로 진출하게 해 준 거지. 그때 우리는 서울을 가보는 게 꿈이었는데, 서울에서 살 수 있게 된 거니까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어. 거기다가 이사 온 다음 날 나는 옆집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도 나가게 되었지. 의지할 데 없는 서울 생활에 신앙은 큰 힘이 되었단다.
고등학교도 명문여고로 진학하게 되었고, 그리고 너랑 소식이 닿았어. 우리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지. 나는 너에게 '계속 공부해야 미래가 있다'라고 독려했던 것 같아. 너는 편지에 적고 있었어. '이미 머리가 반은 굳었다'라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네게 공부하라는 말은 쓰지 않은 듯해.
내가 여고를 졸업하고 대입문제로 방황하고 있을 때 너는 군대에 갈 나이라 고향으로 내려가 공익으로 근무했지.
나는 네가 무척 보고 싶었어. 그래서 방학이면 고향 이모할머니댁에 다니러 가곤 했었는데, 그해 겨울에는 시간을 내서 널 찾아갔지. 너의 어머니께서 참으로 따뜻하게 나를 맞아 주셨어. 너와 지냈던 시간들은 꿈결 같았어. 너의 집은 초가집이었는데 마루가 있었고, 동그란 문고리가 달린 창호지로 만든 문이 달려 있었지. 부엌문은 나무 문이었어. 사투리로 '바라지'라고 불렀지. 삐걱거리는 나무 걸쇠로 빚장을 질러서 문을 닫아 두었지. 방은 아랫목이 따뜻했고, 너의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은 갖가지 나물에 구수한 된장국이거나 김칫국이었는데 아주 맛이 있었어.
지금은 돌아가셨겠지. 살아생전에 찾아뵙고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내가 너무 도리를 못한 것 같아.
몇십 년이 지난 후에 초등학교 동장회에서 너를 만나서 들은 얘기는 그때 졸업할 때 담임 선생님이 너는 진학을 못하고 나는 진학을 하니까 전교 1등 상(전라남도 교육감 상)을 나를 주자고 했다며? 너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고. 실질적인 1등은 너인데, 나를 위해서 네가 양보해 준 거잖아.
"정말 고마워."
너는 어쩌면 나의 은인이 되려고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야. 나에게 잘해 주기만 하고 너는 나한테 받은 게 별로 없잖아. 아니 도리어 내게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겠어. 네가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로 날 찾아왔을 때,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잖아. 실은 그건 거짓말이었어. 나는 집안의 과잉 기대 때문에 거듭되는 재수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너를 계속 만나면 대학을 못 갈 것 같았거든.
"미안해."
차두리 선수를 닮은 너의 까까머리는 언제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지. 교문에서 주번을 서기도 하고. 나는 너를 보고 살포시 웃어. 나는 지금도 네가 좋아.
"나의 첫사랑, 늘 네가 보고 싶어."